李元相(아이강원닷컴대표이사·前 강원산악회회장)



'명아주 지팡이에 나막신신고 깊은 골짝 큰 시내를 왕래하면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소용돌이 치는 여울을 바라보며, 맑은 못을 감상하고 아슬한 다리 위를 거닐며, 무성한 나무그늘에 앉았다가 그윽한 골짝을 찾아가며 높은 봉우리에 오른다. 어찌 이를 즐기지 않고 죽으랴'(허균의 '閑情錄' 중에서)

명아주 지팡이를 등산 스틱으로, 나막신을 등산화로 바꾸고 나면 꼭 지금 나의 모습이 아닌가. 산을 오를 때의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또 선현이나 나 같은 범인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사실 오늘의 여정에는 아슬 아슬한 다리와 높은 절벽, 수량을 알 수 없는 장대한 폭포가 포함돼 있다.

소적응을 위해 시누와(2050m)로 내려왔던 우리는 이번 트레킹의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위해 다시 트레킹을 시작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는 이틀 남았다.

오늘과 내일,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올라야 4130m의 최종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이틀간 고도를 무려 2000m이상 올려야 하는 고된 일정이다.

10월21일 새벽5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짐을 꾸렸다. 아침 6시50분 출발준비를 하다보니 광주트레킹팀 20여명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별도 산행 팀으로 우리나라 스님 두 분도 만나 인사를 나눴다. 하산 길에서도 포터 1명만을 대동하고 산을 오르는 우리나라 여성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트레킹, 그것도 해외 원정 트레킹이 많이 대중화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트레킹은 원래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달구지를 타고 수렵지를 찾아 집단 이주하던 데서 유래됐는데, 요즘에는 고행하는 목적여행, 즉 탐험여행이나 등반 여행 도보여행을 말한다. 국내, 특히 강원도에도 이런 종류의 트레킹 상품들이 많이 개발돼 있고 최근에는 해외원정 트레커들이 늘고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 덧붙이자면,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크게 3개의 코스가 있다. 랑탕 히말 코스가 그 하나고 지금 우리가 가는 안나푸르나 코스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지역이 있다. 3개 코스 모두 나름의 독특한 풍광을 갖고 있는 코스다.

안나푸르나 지역의 경우 3개의 코스로 나눠지는데,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 남봉을 보기 위해 비레탄티∼고레파니∼푼힐전망대로 가는 코스와 안나푸르나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촘롱∼뱀부∼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그리고 다시 베시사하르∼토롱라∼묵티나드∼좀솜으로 연결되는 일주코스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코스가 있어 각자의 체력과 시간을 고려해 적당한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정보를 하나 더 추가하면 해외트레킹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가 있는데, '클럽 아프리카'가 그 중의 하나다. 왜 이 업체를 소개하느냐면 업체 사장이 강원대 산악회 출신인 김수현씨인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팀도 김수현씨 신세를 톡톡히 졌다. 여행경비뿐 아니라 트레킹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해 준데 대해 글로 나마 고마운 마음을 남기고 싶다.

누와를 출발한 우리는 오전 11시30분 뱀부(2140m) 롯지에 도착했다.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1그릇에 60루피) 다시 트레킹을 재개했다. 이번엔 아주 깊은 계곡의 연속이다. 지금까지 4시간20분을 걸었는데, 앞으로 6시간을 더 걸어야한다니 다리가 점점 더 무거워 온다.

그래도 이 비경을 지나칠 수 없어 카메라를 찾으니 온데간데 없다. 도중에 사진을 찍고 그냥 두고 온 것이다. 할 수 없이 눈으로 사진을 찍으며 이 대자연의 요모조모를 머리에 새겼다. 절벽과 폭포가 히말라야의 또 다른 비경을 꺼내놓았다.

뱀부에서 1시간 30분을 지나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하니 4시10분전이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출발, 오르막을 거의 기다시피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데우랄리(3150m)이다. 여기서 야영을 하고 내일 최종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를 계획이다.

원래는 2시간 코스인데 악을 쓰며 오른 탓에 1시간 30분 만에 데우랄리 롯지에 도착했다.

10월22일 아침 5시 눈을 떴다.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부슬거린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내렸다. 오전 7시에 출발을 했는데 고도가 높은 탓인지 진행이 더디다. 대원 대부분의 걸음걸음이 이전 같지 않았다. 나도 숨이 차 50보 이상을 연속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워낙 힘들어서인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사서 고생하고 있다는 후회까지 들 정도로 고통스런 오르막의 연속이다.

드디어 2시간30분만에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요기를 하며 한 30분정도 쉬고 있는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미리 올라있던 선발대(변광제 김상봉 서상훈)가 마중을 나왔다.

이들 공격조는 텐트피크봉(5663m)등정을 위해 한국에서 3일 먼저 출발했던 팀이다. 이들은 그동안의 산중생활로 검게 탄 얼굴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번 트레킹을 이끌고 있는 채희일대장(강원산악회 회장)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손을 맞잡는다.

이들 공격조는 텐트피크봉 정상을 오르기로 했는데, 눈이 얼지 않아 당초 예상했던 빙벽루트가 설벽 상태였고, 능선 길은 무릎까지 눈이 빠져 부득이 후퇴를 했다는 것이다. 대신 김상봉 대원이 옆의 락피쉬봉(5400m)을 등정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조로부터 그간의 상황을 듣는 동안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날씨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오전 11시30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비는 계속됐다. 좀 더 올라가니 비는 싸락눈으로 변해 우리 시야를 막았다. 숨은 턱까지 차고 열발자국을 못가고 숨을 몰아 쉬기를 몇차례, 안개속에 성곽 같은 곳이 보인다.

바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20m)이다. 지금 시간 오후1시30분, 지척에 안나푸르나 남빙하와 텐트피크 봉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때로는 거대한 괴물처럼, 때로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처럼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 눈을 흐리고 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 그 자체가 아닌가. 한국을 떠난 지 7일만에 최종 목적지에 선 것이다.

동안의 고생은 어느 새 말끔히 씻겨져 나갔다. 사서 고생한 보람을 얻은 충만감이 대원들 모두의 얼굴에 가득했다. '풍요의 여신'으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인간에게 처음으로 정복된 8000m고봉은 여러 위성봉을 거느리고 하늘과 맞닿아 있다. 나는 지금 하늘과 땅이 악수하는 그 곳에 와 있다.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이 교차하는 이 곳의 신성(神聖)앞에 나는 그저 겸허할 뿐이다.

오늘 저녁은 우리의 성공적인 산행을 자축하는 파티를 열었다. 럼주에다 콜라를 섞은 히말라야식 정상주로 그 동안의 여독을 풀었다. 마침 이곳 롯지 주인의 사연이 우리를 더욱 푸근하게 해주었다. 이 곳 주인은 한국에서 3년간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롯지를 인수한 사람이었다. 한국말도 능숙하고, 특히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며 우리 일행에게 특별 대우를 해줬다. 우리 일행은 롯지 주인의 친절에다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친 즐거움이 겹쳐 히말라야 트레킹 중 가장 아름답고 푸짐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분수와 능력의 한계를 준엄하게 인식시킨다. 우리는 산과 친하되 산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산은 자모(慈母)인 동시에 엄부(嚴父)이다'(안병욱의 산의 철학에서)

나는 히말라야에서 히말라야보다 더 큰 마음속의 '산'을 얻어 돌아왔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