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유인석 장군 다시읽기
한말의병 사상적 기틀·해외 독립운동 기초 다져… 귀국 후 교육 헌신

춘천 출신 의암 유인석(1842~1915)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병장이자 기호학파와 화서학파의 학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유학자이다. 경술국치 100주년 이후 ‘의암 정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올해는 유인석 선생의 탄신 170주년을 맞아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의암제위원회(위원장 원영환)는 매년 4월12일에 개최되던 의암제 개최일을 올해부터 의병의날로 제정된 6월1일로 변경해 봉행하기로 하고 선생의 업적을 기린다. 6월1일 열리는 제28회 의암제를 앞두고 강원도가 낳은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위대한 사상가인 의암 선생을 재조명해본다.

 

▲ 의암 유인석 선생 동상 사진출처=앤사이버 사진부


#13도의군도총재…항일투쟁 선봉

의암 유인석은 1842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그는 화서학파의 학맥을 이어 위정척사사상을 항일의병정신으로 계승시켰으며 한말의병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다.

을미개혁과 명성황후시해 사건으로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 된 시점에서 ‘호좌창의진’을 맡은 의암 선생은 강원·경기·충청·경상도 일대의 의병들을 모아 제천성과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항일의병 전쟁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의암의 의병정신은 을미의병 당시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에서 공표했듯 당초부터 성패는 헤아리지 않고 병(兵)은 패할지라도 의(義)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굳은 신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제의 침탈과 맞서 국가의 명분을 정당화하고 주체적 자각을 기반으로 무력으로 맞선 초기 의병의 지도자란 점에서 훗날 광복의 밑거름과 근대 의병사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의암 선생은 1876년(35세) 김평묵·홍재구 등 46명의 유생을 규합해 ‘병자수호조약반대상소’를 시작으로 구국 활동에 뛰어들었다.

을미사변을 맞은 1895년에는 제천 자양영당서 화서학통의 총회로서 향음례를 열고 의병봉기 여론을 일으켰다.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제천·충주·원주지역을 장악하는 등 전과를 올린 의암 선생은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 240명의 잔여 의병부대를 이끌고 중국 서간도 봉천성 관전현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된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국내에서 항일의병투쟁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해 해외 독립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1910년 조선 13도의군도총재로 추대된 의암은 이범윤, 이상설, 안창호, 우병렬, 이진룡, 홍범도, 정재관, 이종호, 최우익, 이갑, 정순만, 김정규 등 당대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구국항쟁을 펼쳤다.

국내에서 의병투쟁을 더이상 전개할 수 없자 의병투쟁의 범위를 중국과 연해주 등지로 확장한 것이다.

이는 임시정부수립의 동력이 될 수 있었으며, 우리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자긍심에 큰 역할을 했다.

한말 의병사에서 의암 선생이 이끌었던 호좌의진의 비중은 매우 큰데, 의암선생이 국외에서 펼친 의병운동의 정점이 바로 도총재로 취임한 ‘십삼도의군’이다. 이 조직은 연해주와 북간도의 항일의병운동세력을 총결집시키려는 노력으로 의암 선생이 국외에서 펼친 의병운동은 민족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의미를 갖는다.

해외 투쟁에서 확립된 의암 정신인 ‘자주독립운동과 함께 모든 민족 구성원 단합’은 선생의 사상과 가치관은 물론 의병사와 독립운동을 대변하고 있다.


 

▲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 위치한 의암 유인석선생 유적지 .


#후학양성·교육 실천적 사상가

책을 던지고 총과 칼을 잡았던 유인석 선생은 화서·기호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조선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유학자로서 부귀공명을 버리고 구국항일사상을 고취시킨 학자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고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친 대유학자인 셈이다.

일본 침략에 맞선 선비의 대처법으로 의암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를 쓸어내는 일’, ‘멀리 떠나서 옛 제도를 지키는 일’,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일’등을 제시했다.

위정척사사상과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의암은 국내외를 누비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한 항일의병의 실천적 지성인으로 후학양성과 학자로서의 의무도 실천했다.

의암 선생은 의병을 이끌고 중국에 망명했다 의화단 난(1900년)으로 귀국 후 평산, 춘천, 제천, 개천, 용천 등지에서 후학 양성과 교육에 헌신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후 1912년 71세 때 대표적인 저서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했으며 선생 서거 2년 후인 1917년 문인들에 의해 ‘의암집(毅菴集)’이 간행됐다.

지난 2010년 의암학회가 국역으로도 완간한 이 책은 한말의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와 일본 침략에 저항한 유림의 사상과 가치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의미가 크다.

이구용 의암학회 회장은 “의암 선생은 구한말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의병대장이자 해외에서도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며 “특히 위정척사와 존화양이 정신에 입각해 항일사상을 고취한 대유학자 의암 선생의 노력은 후세가 잊어서는 안 될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최경식 kyungsi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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