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칠

문화원 도지회 사무처장

춘천문화원 식구들과 평창지역의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상원사, 월정사, 봉산 서재, 메밀꽃의 고향 등등…. 그중에 지금도 가슴에 짠하게 남아있는 아린 감정의 응어리 하나, 오대산 사고. 비포장의 상원사 길을 터덜거리며 쉬엄쉬엄 내려오다가, 눈곱만한 팻말을 간신히 발견하고 숨 가쁘게 달려 오른 곳에 우리의 넋은 있었다.

창연(蒼然)하다 할까? 아니면 창연(愴然)하다 할까? 상면의 기쁨보다는 오백 년의 비감으로 복받치는 상실의 감회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텅텅 빈 공간, 먼지 쌓인 마루, 빼앗긴 역사, 속수무책으로 파고드는 패배자 같은 자괴감, 이런 단적인 표현들밖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사고를 지켜야 할 수직사는 황량하게 빈터만 남아있고, 불법의 가피력을 베풀어야 할 영감사엔 참선에 드신 스님의 고무신 한 켤레가 외로웠다.

사고로 오르는 곳곳에 걸려있는 역사회복의 간절한 외침들은, 어쩌면 가공할 폭력과 바위처럼 군림한 거만한 독선 앞에 선처를 바라는 가녀린 호소처럼 나약하게 다가왔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초라한 현주소 같기도 했다.

어찌 보면 ‘오대산 사고’는 우리역사의 굴절 많은 실상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930여 회의 외침을 당하는 질곡의 여정에서, 짓밟히고 찢기고 빼앗기고 능욕당한 아픔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하는 건 차라리 고문이다.

중원을 주름 잡고 동서를 넘나들던 폭력배들의 난동 앞에, 빈약한 결기(決氣)하나로 대항하고자 했던 선비의 기개가 얼마나 무력하고 허무했던가를 우리의 가사밭길 역사는 웅변으로 증명한다. 특히 정복전쟁을 직업으로 여겼던 비호같은 초원종족들은, 우리가 강도(江都)에 칩거한 40년 동안 맘껏 활개치면서 온갖 패악질을 다했고, 간교하고 표독한 섬나라 칼잡이들은 간특한 술책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농락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번번이 당하기만 했을 뿐, 제대로 본때 있게 복수 한 번 못해 봤었다. 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외침을 막아 주권을 지키고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은, 오륜으로 얽힌 인간사뿐 아니라 국가 대의와 역사발전의 대원칙인 것이다. 오대산 사고의 시사는, 결국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준엄한 질책과 경고가 아닐는지?

얼을 빼앗긴 분노, 자존심을 조롱당한 수치, 심장을 난도질당한 아픔으로, 오대산 사고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제안한다.

첫째, 지난 2006년 일본으로부터 환수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이 아직도 제자리에 반환되지 않고 있음은, 국가에 의한 또 다른 약탈이나 다름없으므로 반드시, 그리고 조속히 원상복구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환된 실록의 각 책에 특정기관의 도장을 함부로 찍은 행위는, 명백한 문화파괴행위이므로 엄중하게 규탄되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지금까지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운동’의 성과를 되새겨 보고, 필요하다면 추진체제의 재정비를 통한 목표달성의 탄력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종교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이루었는데, 앞으로는 범도민적인 차원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면 좋을 것 같다.

셋째, 오대산사고의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우리 국민의 역사의식 고취의 계기로 승화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학생들에 대한 국사교육의 강화는 물론이고, 대학입시와 각급 채용시험에서 국사과목의 시험비중을 높여 나간다면, 자연히 우리 국민의 역사의식은 확실하게 정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교육의 다양성과 글로벌화도 좋지만,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뼈를 묻을 조국에 대한 사랑과 굳은 신념 또한 중요한 가치이며 민족만대의 반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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