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섭

한국폴리텍III대학장

며칠 후면 우리는 다시 6·25전쟁 62주년을 맞는다. 6·25전쟁은 우리가 겪은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 수반했다. 3년 1개월 남짓한 전쟁기간 동안 남북한 인구의 60%인 18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산업시설 43%, 가옥 63%가 파괴되는 등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며, 전쟁고아 1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이 발생하였다.

세계 전쟁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은 쌍방 간의 휴전협정으로 멈추어 섰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강대국들의 원조 없이는 의식주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汚名)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의 원조를 통해서만이 국민들의 배고픔과 고통을 달랠 수 있었다.

1953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경제에 대한 선진국의 구제 및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고 1960년대 초부터는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 하에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열화와 같이 번져나가는 가운데 기술주도의 공업화 전략에 힘입어 산업기반 구조의 혁신과 내실화를 다져나갔다.

이러한 피나는 노력으로 197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574달러를 넘어가면서 국제개발협회(IDA)가 저소득국에 제공하는 연성차관 지원 대상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국가 분류 카테고리가 변경되었으며 1987년에는 대외경제협력기금을 조성하여 후발개도국을 지원함으로써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에 무역 1조 달러,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업적을 달성하였다.

이는 근현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로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이 불모의 땅, 자원빈국에서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국민이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과 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천막을 설치하고 흑벽돌 막사를 지어 교실로 활용하는 등 아이들 가르치기에 극성(?)을 다했는가 하면 전후 복구 기간 중에는 지원 받은 원조 물자를 이용하여 무려 3천여 개의 학교와 교육시설을 단기간에 세워 교육입국의 토대를 다졌다. 이러한 기초 교육환경의 인프라 구축을 바탕으로 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과학기술 분야 엘리트 양성을 위한 한국과학원(현재 KAIST의 전신)과 기간산업 현장에 필요한 중간기술자 양성을 위한 직업훈련원(현재 한국폴리텍대학의 전신)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여 기술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오늘날은 그 나라의 기술력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술 전쟁의 시대가 되었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기술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순간 다시 원조를 받는 나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기술력의 중요성을 인지한 강대국들은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면 상대국의 첨단 기술을 알아내기 위하여 국가 차원의 정보전을 암암리에 치루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첨단 기술을 가진 나라가 강대국이며 그 기술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우대받는 시대이다. 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관심만이 우리 미래 세대가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임을 우리 국민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이며, 6·25 전쟁 발발 62주년을 맞이하여 국민 모두가 한 가지 이상의 평생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우리나라가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기술 강국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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