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 완

영월 법흥사 주지스님

‘남들에게 존경받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를 존중하라’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은 예사로이 받아들여선 안된다. 실제로 자신이 자기를 소중히 여겨야만 다른 사람도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법이다.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를 비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떤 일을 추진하다 실패하면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라며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고 스스로를 자조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자조하게 되면 결국 나약한 자신의 모습만 만들어갈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비하를 하는 이를 외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엔 연민이 발동해 관심을 가져주지만 자기 비하가 지속될 경우 자신이 기울이는 관심이 쓸데없는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 비하의 부정적 관념이 전염되므로 함께 불쾌해진다. 자기 비하의 사람과 만나게 되면 언제나 불쾌하고도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

셋째는 그런 사람과 함께 하면 별로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나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또는 비하하는 사람을 외면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에게 불만이 많으면 세상이 좋아 보일 리 없다. 그러나 늘 명랑하고 밝은 얼굴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그가 세상의 거울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밝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가꾸고 웃음을 배운다. 자신을 늘 긍정적이며 밝은 인물로 가꾸어 나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문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용재총화>에 계승(鷄僧)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계승은 이름도 법명도 아니다. 닭소리를 아주 익살스럽게 잘 내 붙여진 별명이다. 계승은 짧은 키에 다리까지 절뚝이며 용모 또한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거지꼴의 이 스님을 사람들은 늘 존경하며 따랐다. 언제나 익살스러운 춤과 노래로 저자거리의 서민들에게 웃음과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이 세상,이 세상/한칸 초가인들 즐겁지 않으리/이 세상,이 세상/누더기 옷을 걸친들 또한 무엇이 나쁘리/염라대왕의 사자가 와 맞아가게 되면/비록 이 세상에 살고자 한들 어찌 될 수 있으리

그는 한칸 초가에 살며 누더기 옷을 걸쳐 입은 걸승(乞僧)이었지만 스스로의 그릇을 무애자재한 법기로 다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환대를 받았다.

사람들의 심리 이면엔 ‘반사성’이 숨어 있다. 예를 들면 같은 거지라도 때깔 있는 거지가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이왕이면 적선도 기분 좋게 하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를 가꾸고 존중하는 사람은 항상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말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이를 가까이 한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보물창고는 내 몸에 있다’하는 것이다. 권력으로 또는 재물로 만들 수 있는 보물창고는 외형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유한한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내 몸으로 이루는 보물창고는 허공을 덮고도 넘치는 무진장이요, 세상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과 환희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자기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불교 초기경전 ‘말리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 몸이 얼마나 ‘귀하신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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