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삼경

시인

며칠째 이어지던 불볕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신하는 수은주의 불기둥은 정말 어떤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멀리 산 속의 초록도 짙어지다 못해 까매지는 것 같은 더위는 항차 그대로 삶아지는 거대한 솥을 떠오르게 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세상이 불타고 녹아내리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산다는 것이 녹록지 않은 판국에 날씨까지 웬 난리인가. 얼마 전 한 지인이 해 준 이야기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소기업의 사장인 한 친구가 간만에 집으로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었단다. 화려할 것까지야 없는 집이었지만 만만찮은 심미안으로 갖춘 곳곳의 명품들에는 부러움과 질시를 주었다고 한다. 와인으로 시작한 술자리는 이윽고 어린 시절 가난했던 기억을 곱씹는 대목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와인 냉장고는 와인의 풍미가 가장 좋다는 10도 안팎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냉방기는 소리도 없이 방안의 습기와 온도를 주재하고 있었다. 이 친구 얘기는 별것은 아니었고, 어렸을 때 한낮 운동장에서 느꼈던 고요함과 아이스께끼 통에서 꺼내먹던 하드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면서 아마 그때는 기계도, 차도 별로 없었고, 얼음도 귀했고, 냉수조차 없던 들큰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결론까지 알아서 내리더라는 것이다. 살다보면, 아무리 합리를 따져도 이해 못할 관행이거나 희한한 아이러니가 많다. 이처럼 몇 겹의 벽에 둘러쳐서 상하좌우로 에어컨 실외기를 틀어대고 그 안의 완전 방어상태에서 어릴적 한낮의 더위와 적요를 그리워하는 일도 그 중 하나일 터이고, 글로 먹고 사는 문인들이 백지를 앞에 두고 느끼는 공포와 쾌감의 이중주가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사’자 들어가는 전문직들에 대한 불신과 한편으로 그 대열에 편입하기를 열망하는 심리 등이 그렇다.

이 땅의 부모들은 마땅치 않아 하면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낸다. 또 불안해하면서 대출을 내어 아파트를 구입한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지 않으면 원시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런 금융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면 될 뿐이다. 경주로에 들어선 말처럼 눈가리개를 하고 달려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합리적인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어찌 결혼을 해서 희끗한 장년의 끄트머리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국민들의 자화상이다. 이 얼마나 고단하고 신산한 생애인가.

산업화를 거쳐 세계화를 향해 간다는 이러한 행로에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단지 그 시기에 맞닥뜨린 것일 뿐 누구도 죄가 없다는 것이다. 함께 달려가자고 해서 달린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셈이다. 확실한 결론도 없는 도로(徒勞)의 질주이다. 그럼에도 각종 매체에는 화려하고 다정하고 행복하자는 합리의 광고가 펼쳐진다. 당신도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각종의 권유가 쏟아진다. 그게 합리요, 공평이라니 또 두 팔을 걷고 뛰어 볼 작정을 해야 한다. 하기사 사회라는 것이 원래 불합리하고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세상은 편안해질지 모른다. 예컨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고, 반상차별이 당연한 것이니 알아서 처분에 맡긴다면 가끔은 정승집 누렁이처럼 한낮 대청마루 밑에서 낮잠을 자는 호사를 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러한 불합리와 불공정을 인정하고 일정의 세경을 받는 것이 그나마 온당하고 안전한 일이라는 걸까?

그저 저녁에 퇴근하여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이야기 하고 산책을 하는 약소한 만족과 행복을 바라는 일이 과도한 합리가 되는 시대인가. 잠시 멈추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또 서로를 바라보며 ‘사람의 길’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 되는 걸까. 바쁘게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작금의 시스템의 끝은 어디이고 어떠한 합리가 이러한 질주를 조장하는 것인가. 이런 세태를 보자니 떠오르는 말이 있다. 모 방송국의 개그프로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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