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사랑이 만든 ‘춤꾼 인생’
마을 전설 춤사위로 승화
도 문화사절단 역할 앞장

‘창작의 고통’이란 말이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 과정이 고되다는 얘기다. 특히 문화예술인들에게 창작은 ‘산고의 고통’이 따를 정도로 감내해야 할 수많은 인고의 시간이 따른다.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이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세상에 예술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드러내보일 수 있다. 본지는 문학을 비롯해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런 도내 예술인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세계와 삶의 애환 등을 들어본다.


 

▲ 춤과 4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해 온 김영주 도립무용단 안무자가 혼이 담긴 몸짓을 선보이고 있다.

손짓 하나 발끝 하나. 표정 하나에도 혼과 열정을 담아 우리네 혼을 표출하고 있는 김영주(57) 강원도립무용단 안무자.

그의 미소 만큼이나 화사한 가을날, 김 씨가 활동하고 있는 강원국악예술회관 무용단 연습실을 찾았다. 얼마 후 있을 LA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 채비에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비록 본인은 이번 해외 공연에 함께하지 않지만 무용단원들이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표정은 시종일관 밝았다.

“유옥재(전 강원대 무용학과) 교수님은 제 정신적인 스승이셨고 정재만 교수님은 춤의 기술을 가르쳐 주신 분이셨어요.”

춤을 사랑했고 춤꾼으로서의 인생을 타고난 그는 13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국무용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아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고 했다.

부모의 만류에도 꾸준히 춤을 췄던 그는 고등학교에서 유옥재 교수를 만나 졸업 후 본격적으로 한국무용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정재만 숙명여대 교수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에게 교육을 받는 ‘문하생 학력인정제도’에 따라 학사 자격을 취득했다. 2007년에는 숙명여대 전통대학원 한국무용반을 졸업했다.

“대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작품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어왔어요.”

그는 그저 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대학 전공자’라는 타이틀과 지위를 지닌 몇몇 사람들의 무시와 괄시는 오히려 그의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고, 이는 예술가로서의 깊이를 보여주는 명작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무용가로서 항상 겸손한 자세를 추구하고 있는 그는 “내가 최고라는 생각은 예술가로서의 끝이라고 생각한다”며 제자들에게도 마음을 비우고 작품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학력과 지위의 부자가 되지 말고 무대 위에서 관객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정신과 마음의 부자가 되라고 늘 강조한다.

그에게 춤은 인생과 같다. 아름드리 큰 나무와 같이 뿌리로 강원도 땅의 정기와 혼을 받아 나뭇잎과 가지를 통해 춤을 표현하고 열매를 맺어 춤의 맛과 향기를 전한다.

15년간 춘천 박사마을과 오탄마을, 원주 호저마을, 동해 봉정마을, 양구 배꼽마을 등에서 그 마을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춤사위를 주민들에게 전수하며 마을의 화합과 친목을 다지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몇해 전 단원들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그는 강원의 춤을 선물로 보여주고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을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호후시 등 지역 275개 학교에서 받아오는 등 ‘민간 문화외교 사절’로서의 역할도 거뜬히 해냈다.

김씨는 “춤꾼으로 태어나 강원도의 청정성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춤을 춰왔고 지금은 도 대표 문화사절단으로서 도립무용단이 발전하는데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며 “앞으로도 무용단 책임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책임과 소임을 다하고 좋은 작품으로 강원도의 춤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춘천 출신인 그는 양구중과 강원사대부고를 졸업하고 강원 춤 아카데미 대표와 한국무용협회 춘천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1996년 하얼빈 동계 아시안 게임 등에서 한국 대표로 무대를 연출했다. 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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