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진

수필가

변명할 일이 생길 때마다 옆 사람에게 눈짓으로 애원한다. “나, 말 잘 못하는 거, 알잖아.” 그러면 그럴싸하게 잘도 둘러댄다. “거짓말은 꼭 나만 시켜!” 남편 잘못 둔 덕 톡톡히 본다. 오늘은 짬이 있는가 보다. 컴퓨터 고스톱 치느라 “어서 오세요.”란 인사를 고개도 안 돌리고 한다. “퍽을 해요, 퍽!” “안 할래요” 상대편의 3점짜리 피를 홀랑 빼앗아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훈수를 팽개친다.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나.

오래뜰 재떨이에 꽁초가 하얗게 누워있다. 담배 곽들까지 동무를 하다니, 못 본체 며칠을 나 몰라라 한다. 마시다 남은 음료수통이 울타리기둥 위에서 나 보란다. 나 못 본다. 살피꽃밭 속에 희멀건 것이 있어 헤치고 보니 마시던 하얀 우유 통이 배를 깔고 있다. 꺼내서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는다. 새까만 심장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다. 새벽의 길바닥은 담배꽁초들의 잠자리다. 우리 집 가까이만 오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이는가 보다. 오물 버릴 심리까지 북돋울 정도로 지저분한 집이 아닌데…. 오르막길이어서 그럴까, 마트 옆이어서 일까, 골초가 많은 이웃을 두어서 일까? 여기에다 과자봉지 음료수병까지 시위를 한다. 돈 받으면서 쓰레기 줍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일자리 떨어질까 봐. 어슴새벽 운동복차림의 아저씨 한 분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쓰레기를 잠깐 모으는 곳으로 간다. 조금 앞서 쓰레기차가 몽땅 싣고 간 훤한 자리에다 까만 양심을 놓고 두리번거리며 사라진다. 아무도 못 본 줄 알고 쾌재를 부르리라. 지새는달이 ‘쯧쯧!’ 한다. 쓰레기가 쌓여있을 때 보면 난장판은 저리가라다. 마트의 비닐봉지를 시에서 사는 규격봉지처럼 던지고 간 뻔뻔한 이들이 많기도 하다. 딱지도 안 붙이고 내놓은 장롱 침대 안락의자들 주인의 배짱은 얼마나 두둑할까. 여러 날 길가를 어지럽혀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꽃밭의 감나무는 감또개 거지주머니들을 애석하게 쓸어 담으며 알뜰히 가꿔 왔다. 그런데 발그스레한 감 3개가 사라졌다. 지나다니는 이들의 눈요기가 되길 바랐는데 허탈하게도 검은 손아귀로 들어가고 말았다.

고양이를 기르는 아파트촌들이 있다. 다들 배가 두둑한 비만형이다. 쥐가 곁에 와서 알짱거려도 먼 산 쳐다보기다. 쥐잡기보다 훨씬 더 쉬운 산해진미가 지천이기 때문이다. 제수로 썼던 고기 떡 과일은 날카로운 발톱 하나만 갈고 있으면 거저 그만이다. 제사상에서 물린 음식은 조상귀신이 맛보고 갔기에 그럴까, 늙은이들이 만든 음식은 어딘지 불결하다고 여겨서 일까? 참, 냉장고가 비좁기 때문이리라. 시어머니들이 자식들 집에 올 적에 바리바리 싸 갖고 온 음식도 쓰레기통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맘만 믿고 승낙을 안 받은 탓일까?잘 안 보여 접촉사고 나기 쉬운 길모서리에다 온종일 차를 세워두는 운전자의 배짱도 두둑하다. 전철을 탈 때 날쌔게 보호석을 차지하자말자 깊은 잠에 빠져드는 늙거나 장애자가 아닌 이들 얼굴에 눈길이 한참 꽂힌다. 고속도로 갓길을 쏜살같이 달려 아슬아슬하게 끼어드는 차주인 얼굴엔 무엇을 깔았을까? 가게 앞 보도에다 적잖은 상품을 온종일 진열하고 있는 장사꾼의 뱃속엔 과연 뭣이 들어있을까? 친목회는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는 “형님 아우”하면서 싹싹 비벼대다가 구닥다리들이 되면 쏙 빠지는 약삭빠른 사업가도 한둘이 아니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연기만 피우면서 뒤에 가는 사람들 코를 괴롭히는 애연가들, 담배연기 없는 공원, 운동장, 정류장, 길거리는 언제나 되려나. 나도 얌체 짓하면서, 뭘 이러쿵저러쿵 넋두리가 이리도 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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