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작가

민주주의에서 민주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말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군더더기 없이 한방에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말 속의 주권은 국민이 주인의 권리를 갖고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영어식 표현인 데모크라시 역시 국민(demo)에 의한 지배(cracy)를 뜻한다. 요컨대, 민주국가란 국민이 주인인 국가다. 그래서 일당독재가 분명한 공산국가인 북한의 국명에조차 ‘민주주의’(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가 들어 있다.

국민은 과연 국가의 주인인가? 왕정이 폐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던 왕이 사라진 것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0년 가까이 전의 일이다. 즉, 지구상의 어느 국가에서도 해당 국가의 국민을 제외한 주인은 있지 않다. 적어도 유엔에 가입된 모든 국가의 정체(政體)는 민주주의이며, 국민이 주인임을 모든 국가의 헌법들이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의 피눈물과 90년대 이후의 정치적 성과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민주화가 진척된 우리는 민주의 첨단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질문에 속시원히 답할 수 있다면 “왜 선거철만 되면 우리는 우리를 다스려줄 ‘우리의 주인’을 뽑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까?”라는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살짝 논의를 비틀어보자. 미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인 새뮤얼 딜레이니는 미국사회에서 가장 살아가기 버거운 세 가지 조건을 합친 <흑인 남성 동성애자(Black, Gay, Man)>라는 책에서 바로 위의 질문에 대한, 뭔가 골똘히 궁리해봄직한 실마리 하나를 제공한다. “1848년 유럽을 휘몰아친 혁명으로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이후 지금까지, 민주주의 국가(democratic nation)에서, 노동자들이 왜 그들을 착취하는 계급의 정당에 투표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보수적일 수 없는 노동자 집단이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딜레이니는 이 질문에 대해 이런 답을 제시한다. “문제는 돈이 지배하는 의식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정당하게 그 대가를 임금의 형태로 가져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고용한 마음씨 착한 주인의 자애로운 마음의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여긴다. 결국 그들의 생활비를 틀어쥔 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주인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그들의 주인에게 자신의 신성한 표를 던지는 것이다.”

유머가 다분히 섞인 답이긴 하지만 만약 딜레이니가 제시한 이 답이 답일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본다면, 한 가지 사실은 명료해진다. 그것은 한 국가가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를 가름하는 것은 ‘노동자의 정체성 인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그 제공한 대가를 임금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획득하는 것일 뿐 머슴이나 하인처럼 주인의 마음에 따라 세경을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주인의 시혜 여부를 두려워하는 방어적 정치의사가 아니라 터무니없는 착취와 학대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는 정치집단(정당)에 자신의 표를 행사하는 공격적인 정치의사로 바뀔 것이다. 만약 이런 진보적 권리의 행사가 확산된다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와 복리의 향상을 강령으로 채택한 정당이 집권할 수 있을 것이며, 껍질만 진보인 대다수 보수정당들이 함부로 진보를 운위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전문적 용어로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라고 표현한다. 기성화된 정치구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주장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적 현실은 노동자에겐 암울 정도가 아니라 암흑이다. 지난 총선 때 기껏 힘을 실어준 진보정당은 사분오열되었고, 최소 득표에 미달되어 등록이 말소된 군소 진보정당들은 대선에서 후보라도 낼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다. 8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이 여전히 ‘민주’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른 것은 이들의 책임이 누구보다 크다. 등록이 말소된 진보정당에 매달 십시일반의 후원금을 내고 있는 필자에게 만약 “이번 대선에 누굴 뽑으시렵니까?”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박, 문, 안, 그 분들 당선되면 쌍차, 용산, 해결될까요? 그런 거, 다시 안 일어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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