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두 잔을 마신 탓일까? 단잠을 청한 지 한 시간이 넘도록 기와집 여러 채를 짓다가 겨우 꿈나라에 찾아들었다.

성천과 둘이서 중앙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내비게이션이 연실 앙앙한다. 전방 70m에 뭐가 어떻고…. 전쟁터에라도 가나, 앞쪽이라 하면 쉬 알아들을 텐데도 굳이 피비린내 나는 6·25를 상기시킨다. 굳세게 ‘전방’, ‘전방’한다.

휴게소에 들른다. 이상하게 여성화장실 앞에 아무도 안 보인다. 이렇게 붐빌 때는 으레 긴 줄이 있어야 제격인데. 전 같으면 화장(?)을 다 하고 나와서 몸 풀기 운동을 한참 해야만 손을 닦으며 나왔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부지런히 앞차의 꽁무니를 바싹 쫓는다. 어느 도시지? 거미줄처럼 여러 개의 전선을 늘어뜨리고 있어야 할 전신주들이 안 보인다. 가로등만 외로이 널따란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유럽의 어느 아름다운 도시에 안긴 기분이다.

퉁퉁하던 8차선 도로의 길바닥 표시들이 날씬해졌다. 두 뼘이나 되던 건널목 표시는 한 뼘 크기로 줄었다. 갓길 표시 선도 반 폭이 되고, 그 밖에도 다들 몸피를 줄이고 으스댄다. 페인트 업자들의 한숨이 열댓 자쯤 깊어지겠다. 어느 로터리에 이르렀다. 덩치 큰 굴착기 두 대가 꾸벅거리며 길 파기가 한창이다. 상·하수도관과 전신·전기관이 배를 허옇게 드러내놓고 땡볕 속에서 곤한 잠에 떨어져 있다.

그 옆의 ‘주민 센터’를 바라보니 ‘볼일 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볼일 터 낯짝의 시정구호에서 ‘도시’란 낱말은 숨어버렸다. 하긴 숫자는 비록 적지만 농민들의 사기를 죽일 필요는 없을 터. 이젠 농촌지역에서도 무슨 도시를 만들겠다던 군정 구호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볼일 터 안으로 들어 가 본다. 직원들은 몇 명 안 되고 PC들의 얼굴이 새까만 게 많다. 10분만 쓰지 않아도 전원이 스스로 꺼지게 되어 있다. 들어 올 때 꽃밭의 풀을 뽑으면서 반기던 젊은이들이 직원들인가 보다.

자연미가 철철 넘치는 유원지에 다다른다. 배불뚝이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앉고 서 정렬하고 있다. 옆의 사람과 손에 손을 다정하게 잡고서. 얼굴에는 다들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다. 데모에 나선 회사원들이나 넥타이를 맨 점잖은 분들이나 모두 단체사진을 찍을 때는 다 같이 주먹을 불끈 쥐고 추어올리던 때는 21세기다. 이젠 국회의원, 시·도와 시·군 의회 의원들은 물론 하다못해 초·중·고·대학교 학생들의 졸업기념 사진도 달라졌다. 만면에 웃음을 띠는 것은 기본이다. 옆 사람의 손에 손을 잡거나, 자기 두 손을 맞잡거나, 손을 흔들면서 찍는 게 습관이 되었다. 갑자기 입안이 달다. 말랑말랑한 홍시가 벌려져 있는 입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냠 냠 냠 냠…’

“당신 밤새도록 무슨 꿈을 그리 많이 꾸었어요?”

“생각이 안 나, 당신과 함께 어디 나들이를 간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생각은 무슨 생각, 개꿈일 거야, 개꿈!” 황장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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