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21세기로 접어든 지 10년이 넘었지만 내게는 아직 ‘새로운 세기’가 아니다.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21세기가 되면 나는 천지개벽이 될 줄 알았다. 모든 반목과 질시가 일시에 사라지리라 믿었다. 싸우는 모두가 지저분해지는 이전투구, 모두가 힘 빠지는 지루한 소모전 같은 건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했다. 외양만 거창할 뿐 공허하기 짝이 없는 온갖 정쟁이 보기 좋게 사라지고 자기 것을 내세우기 전에 상대의 장점을 먼저 살피는 배려의 정치가 시작되리라 꿈꾸었다. 21세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안목이 환하게 열려 위선과 가면이 더 이상 진실의 얼굴을 가리지 못하고, 이타심이 무장무장 생겨나 이기심이 발붙일 곳을 잃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이, 다수가 휘두르는 폭력에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던 소수자들이, 마초들의 비열한 웃음에 조롱받던 여성들이, 시험기계에 불과하던 학생들이, 재벌의 문어발에 내몰려 뒷걸음질만 치던 골목의 상인들이, 몸과 정신이 한꺼번에 구속되어 있던 양심수들이 -개벽한 천지를 향해 두 팔 활짝 벌리고 웃음의 폭탄을 터뜨릴 거라고 상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반쪽짜리 나라가 하나의 온전한 나라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상상과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21세기는 이전 세기의 우울과 비애를 고스란히 안은 채 바닥모를 허무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우린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이런 맥 빠진 중얼거림이 귀를 간지럽혔다.

20세기를 10년쯤 남겨놓은, 그러니까 군사독재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겨우 이름만 문민(文民)인 정부가 들어선 어느 날, 청춘을 온전히 민주화 투쟁에 바쳤던, 남은 건 바닥난 통장과 진통제 없이는 견디기 힘든 궂은 날씨와 수면제에 의지해야만 겨우 몇 시간이 보장되는 잠뿐이었던 한 선배가 소주잔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읊조렸다. “한국의 20세기는 참 우울해. 나라 없이 40년을 살다가, 남의 손 빌려 찾은 나라를 반 토막으로 잘라먹고 또 40년을 살았어. 남은 10년 안에 이 신세를 면할 재주가 있을까? 없겠지? 그런데 이러고도 우리가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는 게 참 신기해.” 그는 부끄럽다고 했다. 부끄러워서 결혼도 못하는 거라고 했다. 자식한테 이런 세상 넘겨주는 게 쪽팔려서라는 말이 우스개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곤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리 부모들은 이걸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아. 부끄럽기는커녕 반 토막짜리 나라가 자랑스러워 미치겠다는 얼굴이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 하나같이 분단으로 먹고 산 사람들한테 줄기차게 박수치고 응원하는 걸 보면. 일편단심도 이쯤 되면 중병이지.”

그렇게 20세기가 지나갔고, 여전히 나라는 반 토막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처음과 두 번째 대통령은 ‘새로운 세기’를 열기 위해 가장 긴요한 것이 통일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향적으로 통일정책을 수립했고, 추진했다. 반 토막 난 나라에서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을 애써 눈감으며 그들은 나머지 반쪽의 나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 반쪽나라의 수장과 악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새로운 세기’에 대한 내 믿음과 생각과 상상이 기꺼워지던,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사람들은 반쪽나라에 그냥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다시 그들의 생각에 충실한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걸 축하하기라도 하듯 저쪽 반 토막의 나라는 어뢰도 쏘고, 대포도 쏘고, 로켓도 쏘았다. 그 어느 때보다 둘은 철저하게 등을 돌렸다.

며칠 뒤면 21세기 네 번째 대통령이 탄생한다. 누가 되든 그는 반 토막짜리 나라의 대통령이다. 반쪽짜리 나라에서 하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실현되지 못한 그 꿈을 위해 잠 못들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마지막 며칠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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