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光 埴 논설위원

 서울대 정운창 총장이 '신입생 지역 할당제' 도입을 꺼낸 이후 다시 이를 재차 확인하자 얼른 떠오른 생각은 '원칙적으로는 찬성한다'였다. 이 말은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 일정한 조건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은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가? 지난 두어 세대 동안 서울대의 화려하고 찬란한 순기능과 놀랄 만한 그 오만의 역기능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서울대를 낙방하고 고려대를 다녔는데, 어느 강의 자리에서 "나는 일찍이 서울대병(病)을 벗어났다."며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보고,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그가 실제로는 아직 서울대를 몹시 의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낙방했으므로 '원한 사무친' 서울대이지만 한국 땅에서 서울대의 현실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라 하버드대를 나온 대 천재 김용옥 선생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이 서울대병 운운하며 가슴속 앙금의 일부를 토로한 것이 아니었겠나.
 서울대는 이렇게 우리에게 선망의 적이요 시기의 대상이다. 서울대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의 성스러운 고답파요 위대한 상아탑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오매불망 자신이 안 되면 아들이라도 서울대에 들어가 가문의 영광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이 끈질긴 편견, 집착, 환상, 욕망.
 그러나 이런 현상을 누구든 쉬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할 수 있다면 한반도에서 서울대를 해체해 버리는 방법이 가장 그럴 듯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서울대 출신 거대 인물군(群)의 완강한 저항이 부딪칠 것이니 실현될 리 만무다. 그러므로 정총장의 '지역 할당제'는 서울대에 대한 지방민들의 욕망을 채워 줄 또 하나의 기회일 수 있기에 진지하게 검토해 볼 가치를 갖는다.
 세간엔 지금 두 개의 의견으로 갈려 있다. 하나는 좋은 생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가난한 수재의 입신양명의 기회를 근본적으로 앗으면서 교육 환경이 좋은 대도시 출신과 부유층 등 특정 지역, 특수 계층 출신에 집중되는 학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줄여 보자는 취지에서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교육의 기회 균등과 공정성을 오히려 저해할 요소가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아, 한반도의 동쪽 후미진 구석에 사는 우리로서는 이 어찌 전자의 위치에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동안 강원도 산촌 어촌 농촌의 가난한 수재가 대도시의 고액 족집게 과외를 받은 아이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나. 이런 원한 맺힌 지난 두어 세대를 지나오면서 강원도 수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울대를 흘겨보지 않을 수 없었거늘. 이 때 들려온 '신입생 지역 할당제 도입' 소식인데, 어찌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제 강원도 각 군(郡)에서 한 해 한두 명씩은 반드시 서울대에 진학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 기뻐할진저 척박한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이여, 가난한 학도들이여. 어떻게 됐든 강원도 인재들이 중앙 무대를 누비는 것이 좋고, 어찌 됐든 큰 물고기는 큰물에 있어야 마땅하다. 이들이 결국 수구초심(首邱初心)할 것인즉 서울대의 지역 할당제 도입은 낭보일지언정 마다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다시,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생각에 잠겨 본다. 서울대 출신들이 면책 특권을 누리는 정치·문화의 권력에서 스스로 겸손해지고, 서울대가 정체성 없는 보편주의 일변도나 지식·돈·스타 패권주의에서 벗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아는 훌륭한 사회적 인물을 키워내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이라는 의미에서 지역 할당제를 도입한다면, 인적 자원에 목마른 우리 강원도로서는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자, 서울대 지역 할당제는 자극제다. 동녘의 영민한 자제들이여, 도전해 볼 만하지 아니한가.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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