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준호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절기는 벌써 입춘을 향해 가고 있다. 엄동설한의 한복판에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동의 세월 견뎌 온 사람들이 따뜻한 봄이 어서 오길 기다리던 간절한 바람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차면 기우는 법, 조금만 더 추위를 참고 견디면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올 것임을 믿으며 아직은 한창인 겨울을 이겨낸 옛 조상님들의 삶의 지혜는 아니었을까? 세상의 변화를 미리 점치고, 미리 준비해온 농부들의 부지런함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봄을 상징하는 입춘은 24절기 중 첫째로 새로운 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부터 입춘절기가 되면 농가에서는 농사 준비를 시작했다. 집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겨우내 보관해 두었던 농기구를 손질하며 한 해 농사에 준비했다. 소를 보살피고, 재거름을 재워두고, 두엄을 만드는 등 바빠지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입춘 절기였다. 입춘에 내리는 비는 만물을 소생시킨다 하여 반겼고, 입춘 때 받아둔 물을 부부가 마시고 동침하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소중히 여겼다.

아무튼 시골에선 입춘을 맞아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은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입춘첩을 대문이나 집안 기둥에 써 붙이곤 했다. 입춘첩에는 한 해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함과 함께, 어둡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었음을 자축하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서울로 이사해서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입춘첩 써 붙인 집을 구경하기 힘 들었는데, 며칠 전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어르신께서 입춘첩을 붙이는 것을 보고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몇 해를 같은 공동주택에 살아도, 하루에 서너 번 씩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인사 나누기 어려운 것이 도시인들의 생활이다. 이번 입춘과 설날에는 저마다의 출입문에 입춘첩을 붙이며 앞집, 옆집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용기내서 인사를 건네 보자. 처음에는 겸연쩍겠지만 다음부터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인사도 나누고, 일상의 이야기들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천보유사>에는 당 현종 때의 명재상이던 송경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다시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인품을 기려 ‘유각양춘(有脚陽春)’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은 ‘다리가 달린 따뜻한 봄’이란 말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마치 봄볕이 만물을 비추듯 했다는 뜻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주택 이웃들을 생활 속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웃사촌’으로 만들어 나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각살이로 조각난 공동주택 사람들을 또 하나의 마을공동체로 가꿔나가는 시작은 아닐까? 차가운 콘크리트 건축물을 따뜻한 마을로 바꾸어 가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유각양춘(有脚陽春)’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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