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우리나라는 수출국이다. 수출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세계적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으며, 한때는 ‘사람’도 수출했던 대단한 나라며, 그래서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외친 권력은 온갖 비리로부터 버젓이 용서되고 사면되었다. 수출기업이 즐비한 공단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굴뚝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시꺼머면 시꺼멀수록 나라가 더 부강해진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국부의 거의 전부가 국민의 주머니가 아니라 수출기업을 소유한 이른바 재벌이라는 대기업의 통장으로, 그 중 상당한 액수가 그 재벌가의 개인금고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초등학교 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검은 ‘루트’의 실상을 파헤치려 한 국회의원은 초등학교 학생도 다 아는 그 사실을 발설했다는 이유로 의원 배지를 반납해야 하는 나라가 또한, 바로, 우리나라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대단한 수출국이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폐유 같은 산업쓰레기와 이른바 전자쓰레기로 분류되는 <e-waste>의 수출국이란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빌어먹을 쓰레기들로 가득 들어찬 컨테이너에는 보란 듯 ‘기부’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부가 아니란 것은, 기부는커녕 오히려 죽음의 선물이라는 것은, 조금만 설명을 들으면 초등학교 저학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언젠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전자쓰레기로 가득 찬 컨테이너가 하루에 600개나 쏟아져 들어오는 세계 최대의 쓰레기마을, 서부 아프리카 가나의 <아그보그블로쉬>의 참상을 본 적이 있다. 이곳의 참상은 끔찍하다는 형용사로는 형용할 수 없는 장면이 거의 매일 연출된다. 아그보그블로쉬의 가난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고통스럽게 죽어갈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중금속으로 들어찬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조금이라도 더 비싼 ‘중금속’을 찾기 위해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되는 듯 해체된 전자부품들을 불에 태워 잿더미 속에서 찾아내는 방법을 쓰지만,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독성 가득한 연기는 결국 고스란히 그들의 폐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아프리카의 어린 폐들을 잠식하며 연기를 내뿜는 전자제품들, 거기에 박힌 파랗거나 빨간 로고에는 바로 세계 굴지의 수출국인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의 이름이 찍혀 있다. 환경국가,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캐나다와 북유럽 국가들이 미국이나 일본과 어깨를 겯는 쓰레기수출 세계랭킹 상위권을 형성한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은 한 개인만 아니라 한 국가에게도 똑같은 운명을 강요한다. 부자(나라)의 도덕적 자각이나 양심 따위에 호소하거나 기대는 건 그 자체로 운명을 깔보는 행위로 취급당한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라는 도전적인 물음은 어떤 해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우울하고 슬프지만 답은 없다. 이렇게 흘러가게 될 뿐이다. 인간의 역사는 늘 이렇게 흘러왔고, 이 흐름이 바뀌리라는 어떤 달콤한 예언도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다. NGO들의 “쓰레기 수출국이라는 오명”에 대해 “그럼, 수입하리?” 라고 당당히 맞받아치는 정부와 재벌은 실은 “쓰레기 수입국만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뻔뻔한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가 읊조리는 사랑, 열망, 아름다움 등등은, 샤넬 향수를 뿌린 종이로 만들어진 장미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

수출이 국부를 쌓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의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3천년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양심교과서의 기초에 해당한다. 물론, 대운하니 4대강이니 하면서 국가의 자연환경을 통째로 거덜내버린 대통령께서 자신의 가슴팍에 국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을 제 손으로 거는 나라에, 골프장이 남아돌아가는데도 굳이 산과 들을 깎고 파헤쳐 독성 가득한 잡초제거용 농약을 뿌리려는 기업과 그런 기업을 쌍수로 환영하는 지자체장들이 즐비한 나라에 무슨 양심교과서 따위가 있을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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