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준호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로 시작하는 <공자> 학이(學而) 편을 적은 메모지가 붙어 있다. 필자의 일터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곳’이니 제법 잘 어울리는 문장이기도 하거니와, 서울 시내로부터 제법 떨어진 산 속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이야말로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는 셈’이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어찌 즐겁지 않으랴.’

그렇다고 해서 교육원이 기쁘고 즐거운 일만 생기는 곳은 아니다. 직장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 고객과 직원의 관계에서, 동료 상호간의 관계 등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갈등과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직장생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이런 상황은 가정에서도, 친구들과의 만남에서도, 동호회 활동 속에서도 흔히 경험할 수 있다.

며칠 전 필자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올해 일곱 살이 된 막내딸이 네 살 무렵에 찍은 사진으로 바꿨다. 평소 필자의 핸드폰으로 게임을 즐겨하던 녀석이 그날은 게임은 하지 않고, 핸드폰을 접었다 펴기만 반복했다. 핸드폰 속에 담긴 사진 속 인물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아빠의 핸드폰에 자기 대신 다른 집 아이 사진을 담아 둔 것이 속상하면서도, 그것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사진 속 아이가 누구냐고 묻지도 못하고, 그저 핸드폰만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속 인물이 저 자신임을 알게 되면서 우리 딸의 서운한 마음도 풀렸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많은 인간관계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잘 조절되고 해소되지 않는다면, 증폭에 증폭을 거듭하여 결국 인간관계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공자> 학이(學而) 편의 세 번째 문장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즉,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라는 내용이다. 살다보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서운하고, 오해하고, 그로인해 상처받게 되는 일을 겪게 된다. 공자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노여워하지 않으셨다지만, 보통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흔히 ‘궁(窮)하면 통(通)’한다지만, 주역 계사전에서는 ‘궁(窮)하면 변(變)’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변화할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게 되고, 소통이 가능하게 되면 인간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소통의 핵심은 변화에 있다. 자기 자신의 입장이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고, 입장을 바꿔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경청하며, 배려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야 말로 진정한 소통(疏通),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시작이라 하겠다.

세상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노여워하기에 앞서, 나는 상대방을 얼마나 알아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돌이켜본다면, 일상에서 만나는 동료, 상사, 친구,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희망찬 새봄을 맞아 저마다의 일터와 가정에서 봄꽃처럼 아름다운 소통의 꽃이 만개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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