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남

시인

시인의 생애를 말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어쩐지 안타깝고 애잔한 구석이 있다. 왜 그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연민의 정마저 느낄 때가 있다. 그들은 생활의 자립기반을 이루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생활 근거지를 잃었거나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고 파산 당하곤 했다.

‘나는 이미 세상에 맞지 아니하는 의복이다.’라고 이상(李箱)은 ‘회환의 장’에서 쓰고 있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 세기를 앞서 살았다고 보이는 이상의 탄식은 누구나 본받을 수 없는 회환으로 남는다. 이상이 쓴 ‘아침’이란 시에는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끄스름이 앉는다. /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 새벽이면 / 폐에도 아침이 켜진다.’ 이처럼 기막힌 자신의 병든 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생활에 실패하고 사랑에 실패했으며 건강에 실패한 그는 왜 문학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까.

이상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이해하지 못한 사회의 냉대는 이상을 절망케 했으며 그건 유행에 맞지도 않는 의복임이 분명했으리라. 그래서 이상은 거듭 절망하고 그 절망이 다시 기교를 낳는 악순환 속에서 문학의 싹이 돋아났다. 사회의 냉대와 비난이 일수록 그는 캄캄한 공기를 마셨으며 병은 끄스름으로 어두워졌다. 병이 깊어질수록 더욱 맑아진 정신으로 매달린 집필이 이상 문학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시인은 대개 가난했으며 그 가난이 아니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시인이 되는 조건이 가난을 전제로 여길 정도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재물이 가난한 자가 아니면 좋은 시를 쓰기가 어렵다. 물질의 포만감을 느끼면 정신의 빈곤을 자초하게 마련이다. 이상은 ‘도야지가 아니라는 데서 비극은 출발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월은 10년을 처가살이를 하며 빈곤과 싸우다 요절했지만 소월 문학은 오늘도 그 빛을 발하고 있으며 만해도 빈곤 속에서 방황했지만 ‘님의 침묵’ 속에서 황금 꽃을 피우려고 했었다. 멀리로는 김삿갓에서부터 윤동주, 이육사, 박용래, 천상병, 김유정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생애는 공통적으로 빈곤과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부잣집에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들 대부분이 시인은 되지 못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을 보충하겠다는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인들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조건에서 작품을 쓰는 것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인들이 무엇을 바라겠는가. 물질적 도움이 생활에 보탬은 되겠지만 실질적인 창작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시인이란 빈곤을 자처하고 고뇌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자. 1억 원의 현금을 시인에게 안긴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생활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작품이 탄생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 선인들은 유배지에서 오히려 문학사에 남는 좋은 글을 썼다. 다산 정약용, 정철, 추사 김정희, 서포 김만중 등 이들은 좋은 별장에서 걸작을 남긴 것이 아니라 고독을 벗 삼아 적소에서 오히려 집필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날 어떤 시인들은 부를 누리며 시를 쓰는 사람도 생겨났다. 기업체를 소유한 시인도 있고 변호사 시인, 의사 시인, 교수 시인도 많지만, 반대로 용접공 시인, 빌딩 페인트공 시인도 있다.

이들이 쓰는 현장의 시가 더 현실감을 독자에게 안겨줄 때가 있다. 물론 우리가 작고한 시인의 궁핍했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물질에 현혹되면 정신이 병들 수가 있다. 좋은 작품이 탄생하려면 경제적으로 너무 빈곤해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배금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진정 고뇌하고 땀이 밴 시편을 대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영양보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을 앓으며 쓴 작고시인의 작품에 머리를 숙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