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부전선 보루 ‘전우의 피’로 막았다
표고 가장 높은 핵심지
김교수 대위·6중대원 목숨 건 방어임무 수행
1953년 태극무공훈장 전수

 

6·25전쟁 63주년, 정전협정 60주년. 총성이 멈춘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분단의 상처는 넓고 깊다. ‘불안한 평화’ 상태도 언제 막을 내릴지 모른다.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강원도내 격전지를 찾아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뜻을 되새긴다.

 

▲ 화천 교암산 전투를 통해 나라를 지킨 고(故) 김교수 대위와 6중대원 공적비



정전을 2주 앞둔 1953년 7월 13일. 화천군 금성지구 교암산에서는 남북이 치열한 ‘고지전’을 펼치고 있었다.

화천군 적근산과 백암산 북쪽, 교암산을 중심으로 불쑥 솟은 ‘금성돌출부’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당시 교암산과 그 좌측은 국군 2군단 6사단이, 우측은 8사단이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적은 금성돌출부를 소멸시키고 나아가 화천까지 확보하기 위해 중공군 199사단을 주력으로 이른바 ‘7·13 대공세’를 펼쳤다.

교암산은 국군 6사단이 1953년 휴전 무렵까지 확보했던 국군의 요지였다.

이 고지는 화천-창도리-회양의 중동부전선 간선도로를 화천과 창도리 사이의 방평리에서 가로막고 있는 형세로, 금성천 동쪽의 아군 주 저항선에서 가장 표고가 높기 때문에 방어편성 상 핵심고지였다.

특히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화천선까지 철수해야 하는 제2군단 방어진의 최대 거점이었다.

적군은 1953년 7월 13일 오전 7시 포병 화력을 앞세워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진지방어에 나선 국군 6사단 6중대는 14일 오전 6시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처절한 육박전과 포병의 진내사격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적의 포탄에 모든 진지가 파괴됐고, 유선통신망마저 두절됐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적의 포화는 강도가 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6중대장이었던 김교수 대위는 침착하게 중대의 진두에 서서 작전을 지휘했다.

하지만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적을 100여 명의 중대원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 대위와 부대원들은 진지에서 대부분 전사했다. 그러나 6중대의 치열한 전투덕에 국군은 재정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교암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부는 1953년 10월 고 김교수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현재 우리나라 최북단 기차역인 철원 월정리역에는 고(故) 김교수 대위와 6중대원들의 공적비가 세워져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웅변하고 있다. 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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