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눈 용사’ 불굴정신으로 원주 탈환
UN군, 중공군 총공세서 사수
1954년 태장2동 전적비 세워

▲ 6·25참전 UN프랑스군 원주지구 전투전적비 제막행사 모습.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에 나섰다.

국군과 UN군은 파상공세를 펼치며 보름 만에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 인근 초산까지 진격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군과 UN군은 6·25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급변했다.

국군과 UN군은 전쟁 종결을 위해 11월 24일 총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평택∼삼척 북위 37도선까지 내려간다.

신정공세로 사기가 오른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앞세워 중동부전선 등 모든 전선에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당시 인민군 5군단과 중공군 37군을 앞세운 중동부전선의 침공 목표는 원주였다.

원주는 동으로는 강릉, 서로는 서울, 북으로는 홍천, 남으로는 충주·제천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민군과 중공군은 1951년 1월 10일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원주를 빼앗아 거점으로 삼고 대전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주를 빼앗기자 평택과 안성 방면으로 후퇴한 UN군 주력은 후방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미 2사단을 비롯해 네덜란드 대대, 프랑스대대, 국군 5사단, 6사단, 8사단 등이 협력해 1월 11일 원주 남쪽 관설리, 서곡리, 홍등리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1주일간의 공방전 끝에 원주를 다시 탈환한다.

다국적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2월 28일까지 한 달간 전략적 요충지 원주를 사수하는데 성공한다.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원주지구전투는 원주∼제천 축선과 원주∼충주 축선의 주요 도로를 확보해 국군과 UN군의 전열을 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중동부전선에서 적군의 남하를 봉쇄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할 계기를 만들고 국군과 UN군의 38도선 공격작전의 발판이 됐다.

휴전협정 후 1군사령부는 원주를 지켜낸 다국적군의 전공을 기려 1954년 3월 태장 2동 1667번지에 전적비를 세웠다.

‘이 돌은 닳아 없어질지라도 임들의 그 위대한 공훈은 저 해와 달로 더불어 빛을 다투어 이 강산을 밝히리’라는 비문은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목숨을 바친 다국적군의 투혼을 되새기게 한다.

원주/이승훈 lsho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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