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준호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해마다 5월이면 박화목 선생님의 동시 ‘과수원길’의 한 소절처럼 온 산천에 하얀 아까시 꽃이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피어난다. 꽃향기도 좋고, 꽃송이 하나 따서 입안에 넣으면 달콤함이 사탕처럼 느껴진다. 작고 둥근 잔잎들이 마주보고 나 있는 이파리 하나씩 따서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친구가 잔잎 하나씩 떼어내기 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까시나무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장미목 콩과에 속하는 낙엽 교목으로 꽃은 식용할 수 있고, 지혈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방조림과 연료목 생산을 위해 많이 심었는데 콩과 식물이라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데다가, 뿌리를 사방으로 뻗어 새로운 나무를 많이 퍼뜨린 덕분에 곳곳에 아까시 숲을 이루었다. 아까시 꽃은 우리나라 주요 밀원이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양봉 꿀 중에서 아까시 꿀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이른다고 한다.

아까시나무는 대개 ‘아카시아’로 알려져 있다. 박화목 선생님의 동시에 등장하는 ‘아카시아’도 아까시나무를 일컫는 말이다. 이 나무의 학명은 ‘Robinia pseudoacasia’인데 풀이하자면 ‘가짜 아카시아’라는 뜻이다. 만국 공통의 이름(학명) 자체가 ‘가짜 아카시아’라니 온 국민이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나무라고 불러도 흠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나무의 이름(학명)을 지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조차 아카시아와 구별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을 이야기하자니,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는 노자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 말은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차피 우리가 아카시아로 부르든 아까시로 부르든 그 나무의 본성이나 본래가 바뀌지는 않으며, 아카시아든 가짜 아카시아든 사람이 지은 이름은 그 나무의 모든 것을 담기에는 애초부터 너무나 작은 그릇이 아닐 수 없다.

‘천하무인(天下無人)’, 세상에 남이 없다는 이 말은 묵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한다. 아카시아와 닮았다는 이유로 그 나무의 이름을 ‘가짜 아카시아’라고 지은 식물학자도, 아까시나무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린네의 초상화가 헨델의 초상화와 닮았다고 해서 ‘가짜헨델’이라고 부른다면 전 세계의 식물학자들이 필자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묵자의 천하무인을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나 혼자만의 나일 수 없는 것이, 할아버지의 손자이며, 어머니의 아들이며, 장인의 사위이며, 아내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형제들의 형제이며, 조카들의 삼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나는 또 누군가의 부하이며, 누군가의 동료이며, 누군가의 상사이며, 누군가의 동료이며, 누군가의 업무상 거래처이기도 하다. 절해고도의 로빈슨 크루소조차 무인도의 나무와 풀, 앵무새와 양, 야만인과 난파선의 선장과 함께 살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름이 한창인 요즘, 아까시나무는 하얀 꽃도 다 떨어지고, 아까시 숲에서 꿀을 채취하던 양봉업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까시나무들은 저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을 받아 연한 녹색의 잎을 검게 그을리면서도 나무의 키를 키우고, 열매를 키우며, 희망처럼 피어날 동구 밖의 하얀 꽃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이란 없음을,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이웃임을 알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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