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흥우

수필가·시조시인

겸양지덕은 사람이 사는 일에서 겸손하게 베푸는 사람에게 덕이 온다고 하여 예부터 권장해오는 삶의 덕목이다. 겸손하고 양보하면 그 덕이 베풀어져서 남을 위하게 되고, 돌고 돌아서 종국에는 자신의 공이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한다는 믿음은 도덕으로서 본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오막 옆에는 올 들어 집짓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도심의 좁은 집터에 높은 건물을 짓자니 통행도 불편하고 각종 소음에다가 집안으로 나무나 철사 도막, 벽돌과 시멘트며 먼지 등이 떨어지고 못과 패널 고정 핀들이 파편처럼 날아들어 차양에 구멍을 내고 유리를 깨뜨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항아리며 집기들이 파손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집을 짓자니 그럴 테지 하면서 참기도 하고 공사 관계자에게 주의를 당부하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도가 심해져갔다. 하나를 양보하면 다른 하나를 더하여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처음에 좀 다부지게 항의하여 주의를 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내 딴에는 겸양지덕을 베푸느라고 한 것인데 결과는 겸양이 화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겸양지화가 되고 만 것이다.

떨떠름하여 텔레비전을 켰다. 야당이 장외투쟁을 한다고 하고, 여당인사는 명분 없는 장외투쟁을 접으라고 서로 아주 다른 주장의 이야기를 한다. 정치가 뭔지 모르고 텃밭이나 일구면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촌로가 보기에는 누구도 겸양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이 뽑아준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를 위하는 회의를 전문으로 해야 하는 분들이 모여서 국민 앞에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바로 저모습인 것이다.

이 분들도 일찍이 겸양지화를 깨우친 모양이다. 하나를 양보하면 둘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잘 배워왔을 테고, 많은 공부와 수련을 쌓으면서 몸에 충분히 익혔을 겸양지덕을 좀체 베풀지 못하는 것이 바로 따라 올 겸양지화가 두려워서 뻔히 알면서도 조금의 양보도 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오늘 날은 이미 겸양지덕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인가. 국가 최고의 인물들이 모여 국민 앞에 보여주는 모습에서 누구에게도 겸양지덕은 찾아지지를 않는다. 겸양지화만을 모든 구성원들이 나처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했다.

겸양지덕은 실종했고, 대신에 겸양지화가 마치 장마철 산사태처럼 덮쳐버린 것인가. 옥토에 덮친 토사는 걷어내야 본디의 곡식들이 자라는 거름 먹은 땅이 나오고 농사가 가능해진다. 우리의 의식에서도 겸양지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와 개개인이 서로서로 겸양을 베풀 때 모두가 덕을 보게 되고 복을 받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데, 언제까지 겸양지화를 부르는 행동을 곳곳에서 이어갈 것인가.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옆의 집짓는 분이 찾아와 자신들의 부주의를 사과하면서 청소를 하겠노라고 한다. 이렇게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배려를 해준다면 서로 도와가면서 사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을 터다. 이 단순한 이치가 바로 잡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