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숙희

양구군 양구읍 중앙길

참으로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여름이었다? 과거형으로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 헛갈려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요즘 들어 조금 시원해 졌다고는 하지만 한낮에 내리쬐는 햇살은 아직도 정수리를 벗겨낼 것처럼 뜨겁고 강렬하다. 입추가 지나면, 처서가 지나면, 8월의 끝자락 즈음이면을 주문처럼 뇌까리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낸 여름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8월이 다 가도록 좀처럼 더위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 기상청의 올 가을 기상예보는 추석 무렵까지도 늦더위가 계속되고 청명한 가을 날씨는 9월 말경이 되어야 한다니 이쯤 되면 짐짓 낭패스럽기까지 하다. 그나마 처서 지난 이후로 아침, 저녁 한결 견디기 수월해졌음을 느끼며 눈 뜨면 폭염, 잠 들면 열대야에 시달리게 했던 여름의 기고만장함이 힘을 잃고 있음에 “옳거니!” 쾌재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워낙 여름이 기세등등했던 지라 아직은 가을이 납작 엎드려 설설 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원래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한 법이니 머잖아 이 가을도 온 산야를 붉게 물들이며 결국은 우리들 가슴에까지 활활 불을 질러 놓을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무엇인가 멀리에서 찾아온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틀림없다. 멀리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반드시 다정한 사람이거나 벗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올 여름을 보낸 사람에게는 오히려 사람보다 바뀌어 찾아오는 계절이 더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아등바등 살다보니 가까운 벗도, 찾아올 이웃도 없는 처지이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찾아오는 계절이 있어 내 마음에도 기다림이 있고 사시사철 방향이 바뀌는 바람과, 무게를 달리하는 햇살과, 피고 지는 꽃이 있어 가슴으로 자연을 맞이하는 여유로움 있으니 이만하면 나의 살이도 제법 즐거운 것이라 할 수 있지 아니하겠는지.

오늘 새벽녘엔 바람이 차서 잠결에 일어나 거실 창문을 닫고 딸내미, 아들내미의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아주 오래전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무렵 8월 말 쯤의 일기장엔 찬물에 샤워를 하는 것에 선득함을 느낀다고 씌어 있었다. 그 당시의 8월 하순이 정말 선선해서였는지 아니면 혼자 있는 자취방의 늦여름이 쓸쓸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예나 지금이나 이즈음은 분명 가을이 여름의 문턱을 넘는 시기임이 틀림없지 싶다. 올여름 같은 무지막지한 폭염 속에서는 모든 사람 아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아마도 목 빠지게 가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바뀌는 것이다. 다만 모든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듯 무르익어야 하고, 숙성되어야 하고, 적절히 뜸이 들어야 하는 것인데 올 여름은 유독 그 시간을 견디어 내는 것이 힘들었던 것일 뿐, 그렇지만 우리는 잘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나 기다렸던 가을이 지금 성큼성큼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가을, 자원방래(自遠方來)다. 무엇이든 찾아온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객담이겠으나 중국의 지도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나 요즘 부패스캔들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한 때는 지도자를 꿈꾸었던 보시라이(薄熙來)의 이름에도 온다는 뜻의 래(來)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중국 사람들 역시 온다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이 즐겨 찾는 중국집 이름도 ‘라이라이(來來)’다. 여름이지만 가을이, 가을인 듯 하지만 아직은 여름이 이글거리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창조주께서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들판에 선선한 바람을 풀어 놓는 것을 불역낙호 (不亦樂乎) 즐거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지난 여름을 이겨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가을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고 여름을 이겨낸 우리들은 그보다 더 위대했다.

그런 우리를 향해 가을이 자원방래(自遠方來) 제 스스로 오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 터이니 다만 마지막 단맛이 과실 깊숙이 스며들 때 까지 조금 더 기다리는 일쯤은 이제 ‘흥!’하고 코웃음을 쳐도 상관없는 식은 죽 먹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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