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자

강원수필문학회 회원

전화벨이 울렸다. 네 살배기 외손자가 “할머니”하고 부르더니 큰 소리로 흐느껴 울면서 “할머니 엄마가 집에 없어요. 집을 나갔어요.” 하는 게 아닌가.

제 엄마가 아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잠깐 가게에 갔나보다 생각하고

“태경이 너 자고 있었니?” “네”

“그러면 엄마가 너 자는 사이에 잠깐 뭐 사러 나갔나보지.”

“아니에요. 엄마 뭐 사러 안 갔어요.” 하고 큰소리로 부정하면서 아주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아이가 혼자 집에 있게 되자 공포감에 저렇게 울고 있는데 먼 곳에 있는 나로선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안타까움에 가슴만 탔다. 우선 손자에게 엄마가 곧 올 거라고 안심시켜 놓고, 엄마 올 때까지 할머니하고 이야기 하자고 달래면서 손자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어느새 손자는 울음을 그치고 내가 묻는 말에 곧잘 대답을 했다.

잠시 후에 제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아이를 혼자 두고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딸을 나무랐다. 태경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를 때리고 괴롭혔다고 유치원 선생님이 전화를 했더란다. 딸은 그런 나쁜 버릇은 단단히 혼을 내서 단결에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는 친구를 때리는 나쁜 아이하고는 안 살 테니 너 혼자 살아보라고 엄포를 놓고 잠깐 문 밖에 나가서 동정을 살폈다는 것이었다. 태경이는 엄마가 정말 집을 나간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흐느껴 울면서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도 태경이는 자기가 잘못해서 엄마가 나갔다는 이야기는 슬쩍 감추고 자고 있었느냐는 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한테까지 혼날까봐 거짓 대답을 한 것이 아닌가.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4살짜리의 깜찍한 거짓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전화를 받기만 하고 걸어보지도 않은 4살짜리 손자가 어떻게 전화를 할 생각은 했으며, 우리 집 전화번호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전화를 걸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딸한테 태경이에게 전화번호 가르쳐 주었냐고 물어보았다.

말로 가르쳐서 외우게 하지는 않고 아빠 할머니 외할머니 전화 단축 키를 적어 놓고 아이에게 엄마가 많이 아프거나 혼자 있게 되면 단축 키를 누르라고 지나가는 말로 말해 주긴 했단다. 그러나 그걸 태경이가 실제로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기에 처하니까 아이가 그 단축키를 눌러서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손자의 그 위기 대처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면 혼자가 된 위기상황을 얼마나 공포로 떨어야 했을까? 손자는 벌써부터 한글을 다 익혀서 아빠, 외할머니, 할머니라는 글자는 문제없이 읽을 수 있으니 단축키 적어놓은 것을 보고 걸고 싶은 곳을 찾아 단축키를 눌러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있는 아빠한테 전화를 하지 않고 먼 곳에 있는 춘천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 아빠는 늘 아이를 안고 둥둥거리고 무동을 태워주는 등 거리감 없이 잘 놀아주는 친구 같은 아빠다. 이런 위기를 당했을 때 아이는 어느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아빠에게 전화를 했을 것 같은데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곧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마디로 나는 손자에게 만만한 외할머니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전부터 매일 저녁 손자에게 전화를 했다. 몇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외할머니와 언제 정이 들겠느냐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전화기를 통해서 말을 주고받으며 손자와의 정을 쌓아가고 있다. 그런 연유로 외할머니는 태경이와 수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만만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경이는 위기가 닥쳤을 때 제일 먼저 전화가 떠올랐고, 전화 할 사람으로 아빠보다 먼저 외할머니가 떠올랐으리라.

그동안 매일 손자에게 전화를 한 것이 참으로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자에게 만만한 할머니로서 공포감에 떠는 손자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니까. 나는 언제까지나 태경에게 만만한 외할머니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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