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준호

농협 중앙교육원 교수

밤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추분(秋分) 절기 지나고 나니 조석으론 제법 쌀쌀함이 느껴지고, 한낮에도 문득문득 가을 기운을 느끼게 된다. 도시의 가을은 사람들의 복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산자락에 오르는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등산복은 단풍만큼이나 곱다.

지난 주말 필자도 산책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뒷동산에 올랐다. 참나무 숲에서는 바람이 불때마다 툭툭 도토리가 떨어진다. 나무는 무더운 여름을 참고 견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뜨거운 햇살을 자양삼아 새봄에 싹틔울 생명을 키워낸 것이다. 여름내 생명을 키워온 것이 어디 참나무뿐이랴! 가을식탁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온갖 과일과 먹을거리가 그러하고, 그것들을 자식처럼 길러낸 농부들의 수고가 그러한 것을!

나무 아래 떨어져 뒹구는 도토리는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이듬해 싹을 틔워 나무로 자라게 될 것이며, 어떤 것은 다람쥐나 청설모 등 야생동물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야생동물들에게 있어 도토리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명양식이다.

그런데 산길을 걷다보면 이곳 저곳에서 도토리를 줍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장난일 수 있고, 계절의 별미를 맛보는 음식재료의 수집일 수 있겠지만, 그것을 먹이로 삼고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역 산지박괘 상구의 효사에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다. ‘큰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먹지 않고 남겨 둔 과실은 이듬해 봄이 되면 새싹을 틔워 나무가 되고, 자라서 큼직한 과실을 키운다. 우리들의 늦가을 기억 속에는, 낙엽 모두 떨어진 감나무에 잘 익은 감하나 달려 있는 그림이 있다. 겨울나는 야생 동물들을 위해 일부러 ‘까치밥’을 남겨 두었던 따뜻한 인심이 담긴….

아직은 한낮의 가을볕이 따사롭지만 그늘 뒤에는 벌써 서늘한 겨울밤을 키우고 있다. 모쪼록 귀여운 다람쥐들의 겨울을 위해 참나무 숲의 도토리는 그들의 양식으로 남겨두는 배려와 인정의 따뜻한 가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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