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응철

수필가

예전엔 나무에 참 많이 올라가 놀았다. 나뭇가지에 덕을 매고 오르내리다가 미끄러지기도 해 친구 하나는 가운데 주머니가 옹이에 걸려 생고생을 하기도 했다. 눈만 떨어지면 나무를 가까이 한다. 등 굽은 나무에 올라 주마가편 식으로 채찍질하며 신나게 말달리기를 한다. 방학하면 곤충채집과 식물채집은 단골 메뉴였다. 자연보호란 단어를 모르던 시절, 시내 아이들은 포충망을 들고 시골 외갓집으로 달려오지만, 포충망이 없는 시골 아이들은 아카시아 가지를 농구 골대처럼 둥글게 휘어 거미줄을 붙여 높은 곳을 겨냥한다.

와이셔츠 통에 수수깡으로 몇 줄 늘이고 곤충바늘로 곤충들을 줄맞춰 꽂고 하얀 나프탈렌을 넣는다. 매미는 쉽게 잡지만 매미보다 훨씬 작은 매미가 있다. 여름 끝자락에서 째람 째람하고 울면 가을걷이가 시작된다. 온 동네를 시끄럽게 찌하고 울어대는 말매미 역시 평생 볼 수도, 잡을 수 없이 부럽기만 했다. 한 달을 통째로 놀다가 개학이 돌아오면 곤충 채집하던 생각이 난다. 쇠똥구리, 방아깨비, 매미, 나비, 잠자리, 장수하늘소, 여치, 풍뎅이, 사슴벌레 등을 서둘러 잡아 개학날 산채로 제출해 설설 기어 다닌다. 식물채집 또한 흙도 떨구지 않고 싱싱한 잎을 쭈굴쭈굴한 채로 붙여 제출하기도 했다. 황새를 가까이 하던 유년기는 아름답다. 황새가 논에 앉으면 황새 모가지 길-뚝하고 소리친다. 그러면 황새는 물음표와도 같은 목을 길게 빼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 명령에 복종한다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벌레와도 친했다. 누가 먼저 벌레를 발견하느냐 하는 시합도 자주 했다. 아직 이른 봄이라 춥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벌레들이 나오기 이른 시기이다. 그때 먼저 벌레를 찾는 게임이다. 대상 벌레는 털벌레, 나비, 잠자리 등 이른 봄에 모처럼 만나는 벌레면 된다. 털벌레로 약속을 했다고 치자, 등하굣길에서 털벌레를 먼저 발견해 소리치면 된다. 털벌레. 먼저 본 사람이 현장을 확인시킨다. 해토도 안 된 언 땅에 곰실곰실 기어가는 털벌레를 발견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반갑고 고마운 털벌레라 흉측하지 않고 지금도 정이 남아있다. 얼마나 반가운가! 소리치면 패자가 정중히 거수경례를 붙여야 한다. 그때 기분은 무엇에 비길 바가 아니다. 세밀한 관찰력을 요한다. 승리감에 취하는 놀이였다.

어디 그뿐인가? 하교 시에 무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쉴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카시아 잎을 뚝 따서 가위 바위 보로 승부해 이파리를 다 따낸 자가 승리자가 되고, 갈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더위를 피하곤 했다. 유년기 때 재배와 사육에도 관심이 드높았다. 새둥지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곤 했다. 둥지에 어린 새끼를 꺼내 집에서 기르기도 했다. 주로 때까치와 콩새였다. 먹이는 올챙이, 개구리 다리를 잘라 먹였다. 유난히 토끼를 많이 기를 때였다. 새를 키우며 먹이를 줄 때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런 경험으로 꼬리가 짧거나 하얀 솜털이 있으면 어린 새임을 알고, 하교 때 그런 것이 기준이 되어 산과 들로 새들을 기도했다.

요즘 어린이들을 보라. 새 눈과 마주치면 무섭다고 난리를 친다. 자연은 인간을 싫어한다. 하나의 생명인 자연이 파괴되면 그 속에 사는 인간 또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자연과 더불어 보내던 유년기가 꿀맛 같다. 우리의 놀이가 더욱 가치가 높다. 아이들은 종일 스마트 폰과 인터넷으로 하루를 보내니 훗날 그들의 추억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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