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대명

전 국방대학원장·서화가

우리 국군과 나라를 사랑하는 노병의 한사람으로 도통사 최영(崔瑩) 장군의 정신과 업적을 통해 국태민안의 길을 함께 찾아보고 싶다.

고려의 마지막을 빛내고 지킨 위대한 영걸이자 충신인 최영 장군은 동주(철원) 최씨로 예숙공 최석의 6세손이다. 장군은 지인용(智仁勇)의 명장(名將)으로 북의 홍건적의 침범을 막고 남의 왜구를 소탕하여 나라를 살리고 민생을 구하였다. 장군의 일생 중에 치른 100회의 출전은 고금을 통하여 가히 세계적인 기록이며, 그의 한결같은 충효와 청백한 지조는 만대의 사표이다.

장군의 인품은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의 선친 최원직 공이 임종할 때, 당시 16세이던 그에게 “너는 황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 여겨라” 하였음으로 장군은 평생을 두고 이 유훈을 지켜 종신토록 청렴결백했다.

그는 풍신이 거룩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무예와 병법에 정통하였고, 한편으로는 시문에도 능하였는데, 전장에서는 언제나 용맹한 임전무퇴의 지장이었다.

공민왕 11년(1362) 장군은 정세운·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 10만명을 대파하여 개경을 수복했으며, 이듬해는 김용의 난을 그 다음해에는 덕흥군의 난을 평정하여 사직을 편안하게 했다.

우왕 2년(1376) 충청도 연산 개태사에서 왜적과 싸우다 원수 박인계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군(61세)은 왕의 만류에도 재삼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밤을 도와 달려갔다. 그는 왜적의 횡포가 심한 홍산(鴻山)으로 나아가 선두에 서서 용감히 전진했다. 이때 한 적병이 숲속에 숨어 있다가 쏜 화살이 장군의 입술에 꽂혔다. 그러나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활을 당겨, 그 적병을 쏘아 거꾸러뜨린 다음에야 비로소 화살을 뽑았다. 피가 많이 흘렀으나 개의치 않고 더욱 분전하자 휘하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여 적병을 거의 섬멸했다.

이 승전보를 들은 왕은 크게 기뻐하여 문하시중(총리)으로 영진시키려 하니 이를 사양하여 말하기를 “시중이 되면 수월하게 전지로 출전하기 어려우니 왜적이 다 평정되는 날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여 장군의 인격과 염원을 다시금 인식시켜준다.

장군의 우국애민(憂國愛民)의 마음은 지극히 간절하여 평상시에는 왕을 보좌하여 부국강병과 신상필벌의 질서에 힘썼으며, 전쟁과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구휼사업과 권농정책에 노력했고, 한편으로는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고 조세를 감면하며 토지를 개혁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또 그의 곡식을 수차례 내어 군량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그의 만년에 우리의 옛 강토인 요동 수복의 웅지가 좌절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의 국가정책인 요동 수복 계획은 조선 초기(태조~세조)까지도 연면히 이어져 조선의 북방영토를 수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388년, 장군의 나이 73세에 불합리한 죄목으로 조용히 비장한 죽음을 받던 그날에 고려의 백성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강직하고 청렴하며 대소백전(大小百戰)에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 해동의 명장이었지만 죽어서는 이름 없는 작은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지금도 경기도 고양의 장군 묘소에는 청춘남녀와 80세 노인에까지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고려의 화랑이요 구국애민의 지도자인 최영 장군은 하늘의 해와 별과 같이 빛날 것이오, 그 꽃다운 향기는 길이 우리 민족과 같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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