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계적으로 가장 큰 건축 행사인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2000년도 주제는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인 것이다(the less aesthetic, the more ethic)'였다. 이 주제를 보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적지 않이 놀랐다. 건축이야말로 예술이라고 단정짓던 전세계 건축가들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바꿔 건축은 미학이 아니라 윤리라고 했으니 놀랄 만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건축은 윤리적인가? 답은 간단하다. 모든 건축물은 개인의 소유라기보다 한 사회의 문화이므로 윤리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해 복구 공사 얘기에 윤리를 먼저 말하는 까닭은 이번 수재 복구 공사 역시 윤리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선 복구 공사가 공적이라는 점이 사회 윤리적인 점이고, 또 수해가 강원도에서 일어난 만큼 강원도의 기술로 복구해 마땅하다는 것이 향토애적 가치 내지 윤리이다.
 물론 다른 목소리도 있다. 가령 "공사 수주에 도내 지역 제한을 둘 필요가 있느냐, 분할 발주 제도와 공동 도급 시 분할 설계를 전제하라는 요구는 지나치고, 건설 자재를 도내 조합에 맡기라는 것 역시 무리다. 결국 강원도 여론이 지역 건설업체를 우선하라 요구하는 것은 건설업 일반론에 위배된다." 이런 불평과 함께 지금 강원도 수해지 지자체 주위에서 그동안 지역 업체를 얕잡아보며 모든 공사를 먹어치웠던 전국 대형 건설업체들이 약육강식의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사려물고 로비를 펼치고 있다.
러나 단호히 주장한다. 도와 수해지 지자체는 역외 대기업들의 이런 따위의 강박에 절대로 넘어가선 안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의 가치일지언정 강원도적 윤리는 아니다. 이것은 대기업의 자기합리적 강변이지 가난한 강원도 중소건설업체들의 공동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이 경우 그야말로 '덜 전국적인 것이 더 윤리적인 것이다(the less nationwide, the more ethic)' 알았는가? 요컨대 수해 복구 공사를 강원도 건설 업체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이란 말이다.
 한 마디 더 하면, 대륙이 혁명의 폭풍 속에서 있던 어느 날 저 삼민주의자 쑨원(孫文)이 책을 한 권 펴냈다. 책의 제1장 제목은 '심리건설'이요, 2장은 '물질건설', 그리고 3장은 '사회건설'이다. 중국의 혁명과 건설을 주로 논한 이 책은 쑨원의 사상이 만년에 신(新)삼민주의로 심화되는 과도기에 발간됐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 책의 이름은 '건국방략(建國方略)'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우리는 수해 복구 공사를 이런 쑨원적 건국방략, 아니 적어도 건도방략(建道方略), 즉 강원도를 다시 세우는 방략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시각에서 기왕의 수해는 혁명 혹은 건설의 한 기회다. 마음을 잘못 써 관급(官給) 비리라는 불사조가 되살아나 외지 업체가 공사를 먹어치워 결국 강원도민에게 돌아갈 돈을 역외로 빠져나가게 해서야 혁명이고 건설이고 건국(建國)이고, 건도(建道) 건시(建市) 건군(建郡)이고 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라서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한다. 대기업을 배제하라. 재차 강조하나니, 대기업은 물러서서 그저 자기부정만을 거듭하라. 이것은 도민 생존의 문제이지 건설업체 간의 단순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니다. 지방 분권을 부르짖는 강원도민은 이 시간 3조4천523억 원의 수해 복구비가 어디로 갈 것인지 주시하고 있다. 더 이상 익명성일 수 없는 이 대명천지에 도민들은 지금 돈의 행방을 결정지을 강원도와 수해지 각 지자체장과 건설 관련 공무원들과… 아, 이들의 높은 강원도적 윤리가 보고 싶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