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진

수필가

나는 ‘갱상도 보리문둥이’이다. 백발이 성성한대도 한창 바쁠 때는 경상도 사투리가 발 벗고 튀어나온다. 풋내기 청년, 군에 입대하기 전의 일이다. 형님께서 동해안 어느 항구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재미를 볼 때다. 우리 집 먹는 입은 연탄공장 종업원들을 포함해서 20명이 넘었다. 형수씨께서는 삼시 세끼 식사 장만해서 먹이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고 허리를 펼 새도 없었다. 안방과 툇마루, 마당이 늘 잔치 집처럼 붐볐다. 밥은 스텐주발에 고봉으로 담아 먹던 시절이었다. 한겨울에도 푸른 들판을 볼 수 있는 보리고장이라, 밥도 보리밥 일색이었다. 거기에 감자나 옥수수, 노란 좁쌀이 섞이기도 했다. 쌀은 아버지와 형님 밥그릇에서나 볼 수 있었다. 반찬은 짠지, 시래기 국, 멸치 젓, 꽁치조림 정도였다. 그래도 모두들 게 눈 감추듯 후딱 해치웠다. 죄다 툭툭 털고 일어나면 형수씨는 빈 그릇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커다란 고무함지에다 차곡차곡 넣었다. 그제야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와 짠지 몇 개 누운 접시 들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내려다보면 허여멀건 퉁퉁 불어 터진 누룽지가 헤엄치고 있었다.

“형수요! 와 밥은 안 갖고, 누룽지만 들고 앉는 교?”

“누룽지가 밥보다 더 맛이 있어서요.”

우리네가 먹어치운 밥으로 치면, 몽땅 한 주먹이라도 될는지….

식솔들은 배가 통통한데, 형수씨만 갈비씨였다.

노총각신세를 못 면해 전전긍긍하던 황 선달에게도 드디어 행운의 햇살이 비쳤다. 8살 아래 고운처녀를 반려자로 맞게 된 것이다. 줄곧 직장생활을 해 온 새댁이라 부엌일이 어설프기만 했다. 보기 딱한 신랑이 팔을 걷어붙였다.

타향살이 막노동에 인이 박혔으니 웬만한 먹거리 만들기는 어쭙잖은 주부 뺨칠 정도다. 가끔 얼렁뚱땅 상 차려놓으면서 꽁치구이고 고등어구이고 생선대가리는 뚝딱 잘라 언제나 자기가 차지했다. 부인에게는 늘 몸통을 안겼다.

이 버릇은 이마와 정수리가 훤해 졌는데도 매한가지다. 벗들 부부모임 만찬자리에서다. 보글보글 생태찌개가 잘도 끓고 있었다. 박 첨지부인이 국자를 들고 이를 한 그릇씩 떠 돌렸다. 황 선달 국그릇에도 가운데 토막을 떠 넣었다.

“아이고! 이러지 마세요. 우리 아빤, 살코기는 싫어해요. 대가리 같은 뼈다귀만 좋아하는 걸요.”“흐흐흐”

황선달의 황소웃음이 가슴속을 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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