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정록

경제부장

몇 해 전 모스크바 출장 당시 볼쇼이극장에서 현대 발레 한 편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기자단을 안내하던 한 인사가 극장을 가려면 모두 정장을 입으라고 했다. 청바지에 편한 운동화가 전부였던 기자실은 남의 옷까지 빌려입는 난리를 친 뒤에야 극장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장은커녕 거의 장보러 나온 듯한 차림의 수수한 중년부인과 어린이들로 붐볐다. 이들은 공연 중간에 웃기도하고 박수도 치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들었다. 반면 정장에 넥타이까지 질끈 동여맨 한국의 기자들은 인내심을 미덕삼아 커튼이 내려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자화상 속에서 우리가 문화를 어떻게 소비하는 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사실 클래식으로 대표되는 고급문화는 우리 몸에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강원도의 한 자치단체장은 그것을 늘 문화와 그 밑의 저급한 하위문화로 구분해 설명하려 했다. 이 단체장은 클래식과 같은 엘리트문화만을 문화라고 단정 짓는 취미를 가졌다.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는 문화라고 하지 않고 풍습이거나 습속이라는 말로 애써 깎아 내렸다. 한 기관의 수장이 가지고 있는 고급문화 혹은 엘리트문화에 대한 편견은 그 지역문화가 발전하기 보다는 충돌과 갈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결과를 보였다.

그 단체장의 시각에 대해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드외는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라는 책에서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조건에 따라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달라진다고 꼬집었다. 부르드외에 따르면 특수한 생활조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미적성향은 동일한 생활조건을 공유한 모든 사람들을 묶어 준다. 신흥 자본가 계급인 부르주아들은 아름다움을 ‘자신 이외의 지시대상은 갖고 있지 않는 이미지’에서 찾는다고 한다. 그들의 문화적 취향은 상당한 학습과 비용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이는 대중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된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처럼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가 아니라 직접 개입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역동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이 역동성이 최근 들어 대중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동력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문화에 대한 취향은 그들이 처한 존재조건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 부르드외의 주장이다. 따라서 특정 세력의 문화를 더 좋다거나 혹은 옳다·그르다로 나누는 순간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문화적 취향이 한 사회의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문화영역의 다양한 교류 혹은 넘나들기가 필요하다. 러시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볼쇼이에서 느끼는 감동만큼은 아니더라도 지방에서 좀 더 다양한 문화적 기회를 갖는 것은 사치라기보다는 권리 아닌가 싶다.

한국은행 강원본부가 이르면 이달 중 강원본부 안에 미술관을 개관한다. 건물의 남는 공간을 강원도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통화정책의 중심인 한국은행이 일반인들에게 문화적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간 누려온 기관의 권위만큼 가볍지 않게 느껴진다. 전광판 예술로 유명한 제니 홀저는 미국의 한 호텔 전광판에 “Money creates taste.”(돈이 취향을 창조한다)라고 적었다. 새로운 봄에 한국은행이 돈이 아닌 열린 마음으로 강원도에 새로운 취향을 창조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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