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겨본다. 2012년 11월 20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와 시도의회의장협의회가 주최한 ‘지방분권 촉진 전국광역·기초의회 의원 결의대회’에는 3800여 명의 지방의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와 무소속의 안철수 후보도 참석, 대회장은 ‘지방분권’ 열기로 가득했다. 대회가 시작될 무렵 내빈석에는 왼쪽부터 주최 측인 김인배 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장, 안철수 후보, 박근혜 후보, 주최측인 김석조 시도의회의장협의회장 등이 나란히 앉았다. 새누리당은 하루 앞서 19일 조윤선 중앙선대위 대변인을 통해 ‘박근혜 후보는 전국광역·기초의회 의원 결의대회에 참석해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애쓰고 있는 광역·기초의원들을 격려하고, 지난 6일 정치쇄신안에 담은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 폐지 실천 의지를 거듭 강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회는 주최측의 대회사, 시민단체 대표의 축사에 이어 박근혜, 안철수 후보의 격려사순으로 진행됐다. 박 후보는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지방분권 확대가 100% 필요하다”며 “기초의원·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제 폐지를 통해 기초의회·단체가 중앙정치의 간섭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지방정치를 펼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강력한 지방분권을 추진하려면 지방의원의 독립성 확보가 중요한 과제”라며 “정당공천 폐지는 여러분이 더 독립적으로 의정활동을 펼치고, 주민의 뜻을 더 충실히 반영할 여건을 만들 것”이라고 역설했다. 안 후보는 “중앙정치가 지방정치를 쥐려는 욕심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면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공언한 뒤 “새로운 지방 분권 시대를 여는 새로운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또 “다음 대통령은 우리 사회 격차를 해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어 매우 어렵고, 힘든 자리가 될 것인데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지방분권이 필수적이다”고 강조했다. 불참했지만 이미 공천 폐지를 약속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 이어 주요 대선 후보들이 하나같이 공천폐지를 약속하자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취재 수첩의 기록이다.

그후 시간은 1년5개월이 훌쩍 지났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등을 공약하고 집권한 새누리당은 위헌 논란과 책임정치 실종 등을 이유로, 상향식 공천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약속을 파기했다. 민주당은 당론으로 정당공천 폐지를 일찌감치 약속했지만 당내 반발로 명분과 실리를 놓고 고민했다. 때마침 정치 세력화에 나선 무소속 안철수 의원 측이 만들었던 새정치연합과 통합하며,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초선거 ‘무공천’을 다시 약속했다. 하지만 오는 6·4 지선 승리라는 ‘실리’와 국민의 신뢰라는 ‘명분’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지난 10일 정당공천을 확정했다.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다투어 공언했던 정당공천 폐지공약의 운명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하지만 전망 역시 밝지 않다. 최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 국회의원이 개최한 정책토론회에는 지역에서 올라온 낯선 얼굴들이 많았다. 토론회 주제와도 무관한 방문객들은 6·4 지선에 출마할 광역, 기초의원 예비후보들이었다. 막강한 공천권을 행사하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개최하는 토론회에 타의반 자의반 동원된 것이다. 정당공천의 긍정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존재하는 국회의원과 지역 정치인 사이의 수직적 관계의 단면이다. 불평등한 착취구조에서 각종 편익을 보장받는 국회의원들에게 기득권 포기가 과연 가능할까. 글쎄…. 거짓된 공약과 허망한 기대만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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