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로

사회부장

참혹한 봄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아이들을 잃는 나라. 직업윤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맡기는 어이없는 나라. 이 나라가 이처럼 허술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나라인지 차마 몰랐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 48분. 이 땅의 남쪽, 진도 앞 바다에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열일곱 열여덟 푸른 청춘들이 무책임한 어른들만 믿다가 속절없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대한민국이 우왕좌왕하는 그 순간에도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고 기다렸다. 그러면서 하루가 가고 이틀 사흘이 흘렀다. 나흘이 지나 닷새째 날이 밝았지만, 그들곁에 다가선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저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서 간절한 희망으로 어른들을 기다렸을 아이들은 어찌 됐을까. 그 어린 것들이 해맑게 웃으며 다시 가족 품에 안길 수 있을까.

4년 전, 천안함이 폭침됐을 때 이 땅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조국을 지키다 검푸른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 뼈저린 경험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우리사회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고 있다.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책임이다.

세월호 침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는 그저 담담했다. 먼 나라 망망대해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우리의 앞바다에서 일어난 사고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구조될 거라 생각했고, 나라의 힘을 믿었다. 대형 여객선을 운행하는 항운회사의 경륜을 기대했다. 그들의 직업윤리를 철저히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육지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그 곳, 손만 내밀면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그 곳에서 아이들은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구원해줄 손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장은 배를 버렸다. 선원들도 선장을 따라 뭍으로 탈출했다.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생각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철저한 배신이었다. 행정 당국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처 이름까지 바꿔가며 ‘안전’을 강조했지만 ‘안전 매뉴얼’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지휘체계 혼선에 책임 떠넘기기 등 각 부처의 대처능력은 기대 밖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어린 생명이 살아나오길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무책임했다. 다 해줄 것처럼, 다 들어줄 것처럼 아이들을 안심시켰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한 목숨, 제 자리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그 끝이 얼마나 참혹하고 비통한가. 간신히 살아온 아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인솔교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진도 앞바다, 그곳에 잠긴 우리 아이들은 해야 할 말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들에겐 꿈이 있고, 희망찬 미래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들의 미래를 위해 어른들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엎드려 사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사회에 광범위하게 번지는 집단적 분노를 가라앉히는 길이다. 그 분노를 조금이나마 달래는 길이다. 이번 사고를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선은 분노 그 자체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우리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이 것밖에 안 되는지 너무나 답답하다”고 호소한다. 이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철저하게 버림받은 저 어린 생명들을 위해 뭐라 말할 것인가. 치밀어 오르는 화가 분노로 쌓이는 시간. 그 시간에 밀려 봄날이 간다. 저 여리고 안타까운 생명을 뒤로한 채 잔인한 4월의 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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