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

지난 4월 25일에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연극 ‘허난설헌’(선욱현 작, 권호성 연출)을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보았다. 연극이 지루함 없이 끝까지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줄거리에 의지하지 않고 장면 장면에 연극적 재미를 집어넣었기에 관객의 주의를 끝까지 붙잡아놓을 수 있었다. 한 공간에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장면, 논두렁식 대화 등의 연출 기법도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난설헌을 강한 여인상으로 부각시킨 점이 좋았다. 난설헌은 당당하게 말하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여자들은 이름 없이 살아야 했던 시절에 난설헌은 부친에게 당당하게 이름을 지어주기를 요구했고, 다른 여인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은 주체적인 존재의 상징이다.

그런데 난설헌을 강한 여인상으로 부각시키는 방법을 재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난설헌은 무대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장면이 자주 있었는데,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보다는 강한 정신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의 끝에 가서 난설헌은 여러 가지 질곡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미쳐버리는데, 미쳐버리는 것보다는 온갖 고통을 속으로 삼키고 꼿꼿하게 서 있는 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을 울리는 방법으로도 후자가 더 낫다. 우리는 난설헌의 시 ‘감우(感遇)’를 주목할 만하다. 이 시에서 난초는 찬서리에 시들어버리지만 그 난초의 맑은 향기는 끝내 가시지 않는다(淸香終不死). 눈처럼 찬 공기 속에서 맑은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난초, 그것은 곧 난설헌(蘭雪軒)이다. 그리고 청정하고 허적한 경지, 그것은 곧 도교의 세계이다.

이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연극에서 이달은 자기의 제자인 난설헌 앞에서 술을 마시며 서얼이기에 사회에서 소외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것보다는 도교적인 정신으로 현실을 초극하는 인물로 그리는 것이 낫겠다. 실제로 이달은 도교적인 시를 많이 썼고, 허균도 그의 시를 맑고 새롭고 아담하고 곱다(淸新雅麗)고 평한 바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그리고 무능한 남편과 지성적인 아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면 그 연극은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유교적인 질서(김성립의 문중)와 도교적인 질서(난설헌이 지향하는 삶)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면 그 연극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작품이 될 수 있다. 물론 연극적 형상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 사상을 바탕에 깔되 연극이 관념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 관념의 냄새가 나지 않게 하고 관념을 구체적 행동으로 형상화하는 것, 대사에 의지하지 않고 행동으로 형상화하는 솜씨는 작가와 연출가의 몫이다.



유교와 도교를 무대로 이끌어들일 경우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한국인들의 현재적 좌표를 점검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다. 유교와 도교는 오늘날까지도 한국문화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이기에 유교적 질서의 장단점과 도교적 질서의 장단점을 함께 제시하고 토론을 유도하면 관객들은 현재 상황에서 삶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과 일본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체계이기에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유리하다. 셋째 도교적 장면의 경우 화려하고 환상적인 무대를 꾸며낼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서왕모의 의상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고전인 김만중의 ‘구운몽’은 유교, 불교, 도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허난설헌’은 유교와 도교가 갈등하고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한다.

이 연극에서 이달이 허엽의 친구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달(1539-1612)은 허엽(1517-1580)의 친구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허봉(1551-1588)의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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