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

강원도에는 잘 복원해 놓으면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각광을 받을 만한 소재들이 상당수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탑돌이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나는 지난 석가탄신일에 월정사에 가서 탑돌이를 참관하였다. 스님들과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도백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함께 어우러져 팔각구층석탑을 도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더군다나 이 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탑들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국보 제48호라서 이 행사가 더욱 돋보였다.

그런데 축제적인 분위기가 덜한 것이 아쉬웠다. 가령 스님의 바라춤이나 소리꾼의 탑돌이노래는 전문가가 공연하고 대중이 감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공연자와 대중이 노래와 춤을 함께 즐기는 형식으로 연출되었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탑을 돌면서 가무를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연출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탑돌이노래의 전렴은 소리꾼만 부르지 말고 참여자 모두가 다 함께 부르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방법이고, 전체적으로 절묘한 연출이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원래 탑돌이는 장엄한 불교 의식과 신명나는 민속 축제가 융복합된 행사였다. 아마도 장엄한 불교 의식으로 시작해서 신명나는 민속 축제로 끝나는 행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불교 의식적인 성격은 약화되고 민속 축제적인 성격이 강화되면서 균형이 깨어졌을 것이다.

신라 원성왕 때 김현이라는 총각은 흥륜사에 가서 탑돌이를 하다가 묘령의 처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처녀는 호랑이였다. 어쨌든 신라시대에 남녀가 탑돌이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는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월군 한반도면 쌍룡리 탑골에 신라 말에 지었다고 하는 작은 절이 있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었는데 이 탑은 지금은 서곡정사로 옮겨 세웠다. 옛날에 양반집 딸과 부잣집 머슴이 이 절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처음 만나 사랑하게 된다. 양반집에서는 크게 분노하여 남녀를 각각 다른 굴에 가두었다. 이듬해 봄에 두 굴에서 각각 용이 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이것은 쌍룡굴전설이다. 이 굴은 지금의 쌍룡양회 채석장에 있었다. 이 전설을 통해서 우리는 탑돌이는 신분질서에서 해방되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원각사(지금의 서울 탑골공원) 탑돌이는 풍기가 문란하다고 해서 금지령을 내렸었다. 그럴 만큼 탑돌이는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는 행사였다. 강릉 사람들은 강릉농악의 삼층 동고리를 월정사 탑돌이로 인식한다.



이상의 사례들로 미루어보면 탑돌이는 축제다. 축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 질서가 파괴되어 있는 상태를 연출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사회 질서가 굳어지기 이전의 상태, 곧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서양 중세기의 축제에서는 일반인이 신부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고,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축제(별신굿) 때에는 상민이 양반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것도 허용되었다. 축제에서는 사회적 신분이 사라진다. 축제에서는 개인이 사라진다. 축제에서는 ‘너’와 ‘나’가 ‘우리’로 어우러진다. 이러한 축제를 통해서 우리는 공동체의식을 다지는 것이다.

축제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래서 축제는 파격이다. 스님들과 신부님들의 축구시합처럼 축제는 파격이다. 사람들은 축제를 통해서 일상적인 삶에서의 오예를 깨끗이 씻어내고, 정화된 마음으로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월정사 탑돌이를 진정한 축제로, 곧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주고, 그들의 유대감을 강화시켜주는 축제로 복원하였으면 좋겠다. 그 탑이 국보이듯이 그 탑돌이도 국보급 축제이면 좋겠다. 법주사, 원각사지, 통도사, 불국사, 해인사 등의 탑돌이와의 차별성에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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