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筠祭에 부쳐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난 지 1 년이 지난 지금 당연한 일이지만 여전히 애국주의가 추모·애도와 함께 미국의 분위기를 압도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 미국의 또 다른 힘의 근원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애국주의 말고 또 다른 거대 세력이 있는데, 그걸 필자는 진보주의라 보는 것이고 최근 이 진보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그 대표적 예가 진보적 사회학자 노암 촘스키가 쓴 '9·11'이라는 책이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3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제국·전제주의적 정책 방향이 결국 테러를 불러들였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또 하나, 미국의 하버드나 스텐포드대(大) 교수 대부분이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에서도 미국의 또 다른 힘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은 진보주의가 힘의 기반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적 애국주의의 반대쪽에 진보주의가 포진함으로써 힘의 균형 또는 힘의 길항(拮抗)이 이루어져 역사적 진보 또는 역사 발전 및 전개에 적절히 긴장이 흐르게 만든다는 얘기다. 한쪽으로 치우친, 그리하여 이완된 사회보다 적당한 텐션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라 보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같은 논리로 유럽연합을 보면, 지난 1990년대엔 거개의 나라들이 좌향좌 했었다. 제3의 길을 주장한 토니 블레어의 영국이 그렇고, 죠스팽이 이끈 좌파연합의 프랑스가 그러했으며, 슈뢰더의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왼쪽으로 기울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제3의 길은 색깔이 흐려지고, 죠스팽은 우파 쟈크 시락에 의해 패퇴했으며, 네덜란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역시 우파가 총선 또는 대선에 각각 승리함으로써 우향우 하고 있다.
 며칠 전 독일이 뚱뚱하다가 마라톤으로 드디어 살을 뺀 요시카 피셔의 인기에 힘 얻은 녹색당과 강릉에서처럼 수해를 당했지만 사후 관리를 잘해 인기를 되찾은 슈뢰더의 독일사회당이 힘을 합쳐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좌파 독일을 겨우 유지시켰을 따름이다. 이 외의 유럽연합은 대체로 우향우다. 결국 10 년 사이에 유럽은 좌에서 우로 노선을 옮겼는데, 이런 좌우의 건강한 경쟁이 유럽 발전의 힘의 원천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해방 이후 건강한 좌우 이념 대립이 있었는가? 아니, 좌파의 주장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분위기가 한 때라도 존재했었나? 친탁반탁 논쟁에서부터 최근의 한총련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좌파는 제대로 대접 못 받은 채 음습한 응달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혁명의 그 붉은 피 냄새를 풍겨 오지 않았던가. 70년대 당산 김철 선생의 통일사회당이 긴급조치에 의해 와해된 이후 길게 침묵하다가 최근 백기완의 사회당이 "우리는 통일좌파다!" 하고 부르짖고, 민주노동당이 권영길 대통령 후보를 내고 있을 따름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좌파적 성향은 IMF로 일찌감치 뿌리째 뽑히고 말았을 뿐 아니라 자유시장경제 즉 신(新)보수로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얼마 전 우리의 지식인들이 '마르크스 코뮤날레'를 결성했음에도 마르크스가 동구와 러시아에서 도망쳐 버린 지금 말도 안 되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마치 진리인 양 이 땅의 좌파, 이 땅의 진보파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진정 사라지고 마는가? 이런 분위기에서 말한다. 그렇다면 포괄적 진보파는 더욱 정신차려야 한다. 역사란 긴장 속에 희망을 가지게 마련이니, 보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진보파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우리의 빛나는 정통 이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허균 사상이다. 분노하는 민중의 힘을 논한 호민론(豪民論)을 비롯하여 허균의 관론(官論), 정론(政論), 유재론(遺才論) 등의 이론이야말로 진보적 개혁사상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돼 보수 세력의 역사적 무책임을 논박하는 이론적 토대를 확보해내야 할 것이다.
 강릉의 허균 선양 사업은 허균 문학의 깊이 있는 연구와 함께 이런 중요한 시대적 과업을 이루는 중이므로 역사적 당위를 염두에 두고 부디 정진하시길 기대해 본다.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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