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아침 공양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공양주 보살님이 “스님 웬 액세서리를 달고 오셨어요?” 했다. “무슨 액세서리요?”하며 보니 저고리 깃에 매미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아마 아침 공양하러 뜨락을 지나올 때 날아와 붙은 듯했다. 공양 후 단풍나무 아래로 가서 매미를 날려주려고 잡으니, 아아! 매미의 영혼은 이미 몸을 떠난 뒤였다. 그 짧은 시간에 낡은 집만 남겨놓고 이사를 간 것이다. 참으로 가볍고 시원한 죽음이다. 이 죽음은 가히 ‘열반’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나무 아래 잘 묻어 주고 산책길을 나서는데 가슴속으로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 말은 70여년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애썼던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임종을 앞두고 한 말이다. 그는 때와 장소만 밝힌 채 제목 없는 사진 단 250점만 남긴 작가로도 유명하다. 학인시절 한 때 흑백사진의 매력에 빠져, 브레송의 사진첩과 중고 카메라를 걸망에 메고 만행을 다닌 적이 있었다.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위대한 사진작가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그가, 평생 결정적인 그 ‘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다녔던 것처럼, 나도 사바세계 중생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부처로 나투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이 산하 저 회상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살다보면 내 삶이 못마땅할 때가 있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데로 잘못 가고 있다고 투덜댈 때가 있다. 그러나 잠시 앉아 깊이 생각해 보라. 지금 이 모든 상황들은 결국 내가 그 ‘결정적인 순간’을 찾기 위해 헤매다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12세기 선승 원오 극근은 그의 어록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온 힘을 다해 산 후,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100% 연소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계곡 옆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이다. 금강송 숲엔 매미들의 합창소리로 떠들썩하다. 하늘엔 흰 구름 몇 조각 흘러가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다. 아침 산책길, ‘결정적인 순간’을 내 옷깃에 슬쩍 와서 빈껍데기만 남긴 채 홀연히 열반에 든 매미. 내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은 따로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찬란한 결정적인 순간이다. 초하루 법회 때 공양미 한 되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올리고 아들 손자 잘되기를 비는 노보살님의 그 마음이 곧 부처요, 그 모습 묵묵히 지켜보는 산천초목이 다 부처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지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기다리는 기회,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은 사실 항상 우리의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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