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

필자는 4개월째 마을민속을 조사하고 있다. 이것은 ‘강원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강원도문화원연합회가 강원도청의 지원을 받아 벌이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업들 중의 하나이다. 도내 18개 시·군에서 일제히 마을민속을 조사하고 있다. 거도적으로 마을민속을 조사하는 사업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강원도가 처음일 것이다. 이 조사를 마치고 내년에 강원도 마을민속지를 발간하면 이 방대한 책은 강원도민의 삶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마을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데에 기본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맡은 마을은 춘천 교외의 아늑한 마을이다. 조선 영조 때에는 20호에 남자 55명과 여자 49명(도합 104명)이 살았었고, 1992년에는 61호에 남자 99명과 여자 107명(도합 206명)이 살고 있던 마을이다. 19세기에는 권위 있는 서당이 있었고 춘천 의병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으며 1960년대 이후로 박사 15명을 배출한 마을, 몽리(蒙利) 면적 10여 정보의 저수지가 있고 상엿집이 있는 작고 아늑한 마을이다.

그러나 지금 이 마을은 쓸쓸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은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다. 마을에 상엿집이 있지만 초상을 치를 때 상여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을 신명나게 해주던 농악은 10년 전에 전승이 끊겼고, 마을 사람들을 긴장시켜주고 유대감을 강화해주던 산신제는 작년에 끊겼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을에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중 60대 이상이 60여 명이고, 내외 2인 가구가 대부분이고, 할머니 혼자 사시는 1인 가구가 10여 가구이다. 마을에 길 고칠 일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일을 하지 않고 시청에서 와서 고쳐주고 간다.

그래도 빈집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할 것인가. 전에 정선으로 민속조사를 갔을 때 산촌의 집을 어렵게 찾아갔더니 그 집은 폐허가 된 빈집이었다. 또 다른 집을 찾아갔었는데 그 집에는 낮에도 컴컴한 방에 할머니 혼자 살고 계셨다. 불 좀 켜시라고 했더니 혼자 사는데 불은 켜서 무엇하느냐고 하셨다. 조사를 마치고 나올 때 할머니는 우리들의 손을 잡으며 가지 말라고 우셨다.

옛날 민촌의 모정(茅亭)과 반촌의 누정은 남정네들의 소통의 장소였고, 빨래터와 우물가는 아낙네들의 소통의 장소였다. 그리고 고샅은 아이들의 소통의 장소였다. 고샅은 또한 아이들과 노인들의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고샅에서 떠들썩하게 뛰놀던 아이들이 마침 그곳을 서성거리며 지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는 풍경은 흔히 있는 풍경이었다. 저녁 먹고 이웃집에 마을 가서 이야기판을 벌이는 것도 흔한 풍속이었다. 서로 갈등관계로 존재하던 향약과 촌계도 있었다. 두레도 있었다.

지금 우리는 개인이 전통적 조직에서 해방되어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식당에 가면 혼자서 식사하는 1인 좌석이 있다. 전철이나 승강기에서 사람들은 옆사람과 이야기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을공동체가 무너지면 결국 국가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마을민속에 관심이 많은 임재해 교수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도시 없는 농촌은 지속 가능하지만 농촌 없는 도시는 지속 불가능하다.”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다음 말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만일 마을이 멸망한다면 인도도 멸망할 것이다. … 미래 세계의 희망은 아무런 강제와 무력이 없고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스러운 협력적 마을에 있다. … 마을문화가 인류문화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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