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영승

도의원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들까요? 참으로 녹록지 않고 때로는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모두들 경제적으로 힘들어 합니다. 어린 시절의 꿈은 아득해지고 털이 듬성듬성 빠진 늙은 말이 돼버렸습니다. 그 쇠잔한 말 잔등위로 아직도 채찍이 내리꽂힙니다. 자식들 뒷바라지도 한참이나 남았고, 노후에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치매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어머님을 뵈올 때면 눈물이 나지만 그 눈물은 뼈를 깎는 참회의 눈물이 아닙니다. 막심한 불효를 자책하나 ‘현실적 상황’을 핑계로 집에서 모시지 못하는 괴로움을 덜고자 합니다. 위선이지요.

어린 시절 당신보다 자식을 더 아껴주신 어머니의 모습이 황금빛 저녁노을처럼 떠오릅니다. 하교 때 집 앞에서 기다리시던 엄마의 따뜻한 모습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머지않은 날 저도 어머님처럼 병원신세를 지겠지요. 세월만큼 빠른 것은 없으니까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고 가니 이 세상 무엇보다 빠릅니다. 자식을 키우며 태산 같은 부모님의 은혜를 절감하면서도 이런 불효를 계속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찬란한 청춘시절 품었던 꿈의 찌꺼기가 남아 앙상한 갈빗대 위로 박차를 가합니다. 박차와 채찍질에 힘을 내보지만 늙어가는 말이 몇 걸음이나 가겠습니까?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 노력은 아마 근심 걱정을 잊거나, 위안을 찾으려는 헛수고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겠지요. 그냥 무위(無爲)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난한 삶에 지쳐 고뇌하는 사람들, 꿈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허덕이는 사람들, 보통의 이웃들과 넋두리하며 위안을 나누고자 하나 그마저 쉽지 않습니다.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연대(連帶)의 붕괴, 공동체정신의 상실, 이웃 간의 정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부익부빈익빈의 심화, 계층의 고착화를 우려합니다. 그 계층이 교육을 통해 세습됩니다.

우리사회에는 부유층, 중산층, 서민층, 극빈층이라는 새로운 카스트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현 사회에서 결손이 결손을 낳을 개연성은 아주 높습니다. 부자들은 가난을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으나 부유층의 아이들과 빈곤층의 아이들은 출발선이 다릅니다. 마라톤에서 부유층 아이들은 이미 10여 킬로미터 앞서서 출발하는 셈이지요.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난 것과 빈곤층 아이로 태어난 것이 게으름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연으로 인해 출발선이 달라서야 되겠습니까? 보다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나라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유층이 좀 양보해야 합니다.



빈곤층의 좌절감과 분노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를 나 몰라라 하다가는 정말로 큰 일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인생에서나 사회적 삶에서나 검은 먹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무지개를 등대삼아 그 뒤의 찬란한 빛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우리시대를 걱정하며 큰 방향을 제시합니다만 구체성, 현실성은 부족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부터 천착(穿鑿)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사회의 부조리를 제도 사회·환경·정부 탓으로 돌립니다. 전문가들 역시 현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지탄하는 부조리에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대부분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부의 구성원들, 즉 공무원들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고 예산도 한정돼 있기에 만능일 수 없습니다.

이 글 역시 현실감 없는 공론(空論)이지만 현실에 집착할수록 나는 없어지고 삶의 무게만 늘어갑니다. 잠시라도 현실의 나를 떠나 객관적 나를 발견하면, 거기서 새로운 모색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칠흑의 바다에 비바람이 몰아칠수록 확실한 좌표가 필요합니다. 나는 어떤 존재이며 제대로 가고는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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