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섭

폴리텍Ⅲ대학장

가을도 깊어 무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만추의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 산간계곡을 불태우고 있는 단풍의 농염(濃艶)이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황홀하게 만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리 곳곳에는 낙엽이 뒹굴고 쌓여가는 모습이 늘어만 가고 있다. 누가 말했나,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잔해(殘骸)’라고. 잔해라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계절이다. 못내 아쉬운 것은 너무 생명력이 짧다는 점이다.

가을의 백미(白眉)는 역시 단풍 뒤에 흩날리는 낙엽의 섭리에서 찾을 수 있다. 사색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젊은이들조차도 떨어지는 낙엽에 시정(詩情)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인생의 가을을 살고 있는 노인들은 낙엽을 자신들의 여생과 견주어 생각하며 비장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이 땅에 먼저 살다 간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가을과 낙엽을 노래했나 보다.

‘시몬, 낙엽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 시는 기막힌 운치로 낙엽과 삶을 하나로 묶어 노래하고 있다. 땅 위를 구르는 낙엽, 그건 바람을 타고 왔다가 가는 인생을 성찰(省察)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을이면 구르몽(Groumond)의 인생 낙엽론을 음미하며 가을 편지라도 쓰고픈 욕망에 잠긴다.

그렇고 보니 우리 집 뒷동산에 오솔길을 만들어놓고 봄부터 긴긴 여름을 지나 가을의 황금빛(낙엽송) 단풍과 낙엽 밟는 소리를 그리워하며 지낸지도 벌써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는 세월이 되었다. 매일 걷는 오솔길이지만 바람의 딸 한비야가 말했듯이 매번 오르고 내려올 때마다 그 모습이 다르고, 느낌 또한 달라서 식상(食傷)할 줄 모른다. 그럼에도 낙엽 떨어진 오솔길을 호젓이 걷는 즐거움이 그 중의 으뜸이자, 그 어떤 유형의 즐거움보다도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안톤 슈낙(Anton Schu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그리고 릴케(Rilke)의 ‘가을 날’에서 가을과 낙엽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계절과 대상으로 기억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에 이르러서는 발로 밟으면 영혼처럼 울고 있던 낙엽이 드디어 갓 볶아낸 커피 향으로, 잘 익은 개암 냄새로 우리의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낙엽이 떨어져 밟혀 부서지고 태워지는 소리는 고통과 윤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바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자기희생이며 환희와 기쁨이고 희망인 것이다. 그래서 오 헨리(O. Henry)는 ‘마지막 잎새’를 통하여 절망 속에서 희망을 꿈꾸지 않았는가?

깊어져가는 이 가을에 저마다 숨 막히는 회색의 일상에서 벗어나 아직도 붉게 타고 있는 가까운 산간계곡이나 수목원을 찾아 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 낙엽 쌓인 오솔길을 걸어보자. 자연의 오묘한 조락(凋落)을 알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우리의 잠들었던 영혼을 깨워줄 것이다. 찌들고 삭막해진 마음에 분명 한 가닥 낭만을 안겨주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함으로 우리들에게 화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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