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규

한림대 경학대학장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존재한다. 공존공재(共存共在)인 우리에게 동행은 중요한 삶의 원리요 가치다. 동행의 사전적 정의는 함께 행하는 것이고, 같이 가는 것을 말한다. ‘동행’이라는 말을 네이버 사진 검색을 해보니 무려 24만 가지의 사진이 나온다. 정말 ‘와우’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의미의 말이다. ‘행복한 동행’, ‘반려동물과의 동행’, ‘달빛동행’ 등 수없는 사진이 인생동행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행사진의 이미지에 푹 빠져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동행사진 보기 정말 ‘강추’다. 인생이 무엇이어야 되는지를 사진으로 알게 만드는 소중한 체험이 될 것이다. 나의 삶을 회고해 보면 동행보다는 독행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요즘 사람들은 동행보다는 독행을 선호하고 심지어는 디지털동행(핸드폰, 컴퓨터, TV)에 몰입을 하고 있다. 일인기업, 일인사무실, 일인시위 등 혼자/셀프가 판을 치는 사회다.

홀로 가면 빨리 가고 동행하면 멀리 가고 오래 간다. 동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다. 감동 넘치게 보았던 영화 ‘워낭소리’는 두 노인네의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동행을 그리고 있다. 또한 수십 년을 함께한 늙은 소와의 동행은 영화의 압권이다. 소에게 자기가 먹던 쌀밥을 함께 나누고 막걸리를 함께 하는 모습은 ‘동행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가슴 찡한 영화의 장면이다. 소를 팔아야만 하는 할아버지가 우시장에서 일부러 터무니 없는 소 값을 불러 소를 안 팔고 마는 할어버지의 마음과 끝내 찬 겨울에 죽어가며 흘리는 소의 눈물은 동행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우리 사회는 동행사회인가. 정치권은 분명 역행사회이고 독행사회인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경험적으로 보면 대통령과 정치인은 선거할 때는 각종 공약과 정책으로 주민/국민과의 동행을 떠들지만, 권력을 잡으면 자신의 정당/기득권/친세력 간의 동행만으로 귀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권이 바뀌면 여전히 새로운 세력의 자신들만의 동행으로 국민과 대중과는 상관없는 길을 가는 것을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각종 복지공약은 국민과의 동행을 약속하는 것이고, 친 서민정책/반재벌정책은 경제적 동행정책이다. 하지만 지금은 역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방과의 동행을 약속한 역대정부는 대부분 친 서울/수도권 정책으로 역행정치/역행정책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동행의 영어단어로 companionship이 있다. 친구라고도 번역되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빵을 함께 한다는 의미다. 동행의 의미에 함께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상위 10%가 나머지 90%보다 힘과 돈이 많은 지금의 우리 사회는 빵을 나눠먹기가 힘든 사회다. 소수의 재벌회사가 대다수의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사회는 정말로 동행사회가 되기 힘들다. 우리사회를 동행사회로 만드는 것이 행복한 국가를 만드는 길이다. 우리의 현 주소인 빈부양극화, 고령화, 저출산화, 남북분단화는 동행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사회에 상대적으로 배고픈 사람이 많고, 소외된 지역이 많고, 지역적/세대간/빈부간 격차가 많은 우리사회는 소위 ‘격차사회’다. 격차사회의 단절에서 동행사회의 행복으로 이 사회의 방향타를 바꾸어야 한다. 부자와 빈자의 동행, 여당과 야당의 동행, 좌파와 우파의 동행, 남한과 북한의 동행, 외국인과의 동행, 왕따없는 사회, 배려사회, 복지사회….

동행은 반드시 같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것들을 이해하여야 동행이 가능하다. 동지와의 동행보다 타인/원수/이견의 사람들과의 동행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적을 원수로 생각 말고 동행자로 여겨야 한다. 북한을 원수로 보면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동행자로 여기면 평화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워낭소리’의 소의 울음소리는 소가 주인과 함께 가자는 동행소리다. 한국사회가 동행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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