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희

도교육감

16년 만에 겪는 수능한파랬다.

그날 아침 나는 춘천 시내 한 학교 정문에 있었다. 학생들은 기발한 문구가 적힌 알림판을 연신 흔들며 응원 구호를 외쳤다. 학부모들이 곱은 손을 비벼가며 따뜻한 차를 권했다. 나도 수험장 들어가는 학생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응원했다. 마음 편히 먹으라, 그동안 기울인 노력이 튼실한 열매로 맺어질 것이라고 했다. 수험생들은 잔뜩 움츠린 채 수험장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부담감에 울음을 터트리는 학생을 볼 때는 마음이 짠했다. 아버지와 선생님의 마음으로 미안했다.

세상은 몰라보게 바뀌는 것 같은데 이 초겨울의 기괴한 풍경은 해가 가도 어째서 달라지지 않는가. 내가 학생 때나 교사일 때나 교육감이 된 지금이나 등장인물만 바꿔가며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연출된다. 도내에선 18개 시·군 43개 시험장에서 1만 6141명이 출연했다.

교문 안으로 사라지는 수험생들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오래전 싸전 풍경이 떠올랐다. 내 어릴 적엔 웬만한 마을이면 다 싸전이 있었다. 너나없이 마트에서 쌀을 사다 먹으면서 그 많던 싸전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되나 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속담을 알기나 할까. 무슨 뜻인지는 안다고 쳐도 그 말의 깊이나 실감은 천차만별이겠다.

어머니 따라 싸전에 쌀 팔러 가면 주인은 쌀을 됫박에 수북하니 담는다. 그걸 그대로 봉지에 담아주면 좋겠지만, 주인은 옆에 둔 둥근 막대기를 들어 됫박 위를 쓰윽 훑는다. 야박하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때 쓰는 둥근 막대기를 ‘평미레’라고 한다. 한자로는 개념, 개론, 개괄 할 때 ‘개(槪)’자를 쓴다.

쌀알처럼 많은 생각[念]들을 ‘개(槪)’로 훑어내고 됫박 안에 남은 생각을 ‘개념’이라 한다.

그래서 개념은 들쭉날쭉하고 복잡 다양한 생각 가운데 공통되는 일반적 생각을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평미레질해서 깎여나간 생각들은 쓸모가 없을까. 오히려 개념에만 사로잡히면 다양하고 풍부한 현실을 잃고 만다. 됫박 속 생각은 고요히 담겨 있지만, 됫박 바깥의 쌀알은 자유로이 튄다. 평미레질로 밀려난 쌀알도 쌀알이다.

어쩌면 정해진 틀에 들어가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가치롭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미래다. 시험이나 취직을 위한 공부는 ‘되 안의 개념’ 공부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상상력, 창의력은 ‘되 밖의 개념’공부에서 싹트고 열매 맺는다.

수험생 모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누구는 되 안에, 누구는 수능이라는 평미레에 깎여 되 밖으로 밀려날 것이다. 어디에 있든 모두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다. 나는 그들 모두의 꿈과 열정을 여전히 응원할 것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말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 시험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들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그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말갛게 익어가는 홍시도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 평화롭다. 세상의 모든 학교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취업과 진학을 앞둔 우리 고3 학생들 마음만은 치열하고 엄중할 것이라 짐작한다.

평화를 바란다. ‘평화’는 평미레질할 때 ‘평(平)’ 자에 ‘벼 화(禾)’와 ‘입 구(口)’를 합친 화(和)가 더해져 만든 말이다. 벼는 곧 쌀이고 밥이다. 누구 입에나 밥이 공평하게 들어가는 세상, 그게 평화로운 세상이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다시 오는 이 계절, 고3 청년들의 새로운 도전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다. 부디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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