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규

한림대 경영대학장

우리는 행복한가? 이 사회는 행복한 사회인가? 선뜻 그렇다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객관적 자료를 살펴봐도 우리는 그렇게 행복한 사회에서 산다고 할 수가 없다. UN이 발표한 ‘2013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156개 국가 중 한국의 국민행복도는 41위로, OECD가 발표한 ‘2013년 한국의 행복지수’는 36개 국가 중 27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행복이 무엇인가는 주관적이며 각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이고 궁극적 목표임에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행복의 보편적 정의를 잘 말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는 여러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로 구성되어 있고, 그러한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의 마지막 단계에는 인간의 궁극 목적에 도달할 것이고, 그 궁극 목적에 이르면 그것은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이며, 최고선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최고의 행복이다’. 쉽게 요약해 보면 궁극목적=최고선=행복 방정식이 성립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있어서 공동체와 이성을 강조하였다. ‘공동체 사회 속에서 타인의 장점을 발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것을 나누면 공동체의 행복이 달성되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베풀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행복이란 인간의 이성적 기능을 통하여 얻어지는 즐거움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방정식이 통하고 공동체와 이성에 의한 행복이 추구되는 사회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는 소위 ‘신자유주의 사회’이다. 개인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호경쟁의 패러다임속에서 행복이 답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정글경쟁사회의 천민성 자본주의 사회를 향하여 모두가 무한 질주하고 있는 사회다. 1%의 승자가 행복하고 99%의 불행한 패자를 양성하는 사회는 불행사회이고 피곤사회다. ‘행복한 개인과 불행한 사회’가 우리의 현주소다. 개인은 저마다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개인의 합인 사회는 행복을 달성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행복의 사회적 총량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소위 제로섬 개념일 것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 속에서 극대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등을 해야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은 2등이어야 하고 누군가는 꼴등을 해야 하는 것이다. 등수사회, 시험중심의 사회의 행복은 제로섬 사회다.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최근의 자본주의 사회는 행복사회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가 없다.



개인보다는 사회가,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주의가 우리가 갈 방향이다. 공동체와 이성을 강조한 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 우리에게 소중하다. 불행한 사회속의 개인의 행복은 결코 행복일 수 없다. 양극화된 소수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적 불안과 불편과 불평을 만들어 주기에 결국 개인의 행복도 보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사회가 행복한 것이 복지사회일 것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행복한 것이 복지사회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고 사회적 범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만드는 개인은 사회적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죄요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본주의도 진화를 하고 있다. 공동체적 자본주의, 생명을 중시하는 지속가능 자본주의 등 여러 모습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행복한가? 보다는 우리는 행복한가? 가 더 중요한 명제다. 공동체 행복론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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