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에 첫 총성… 강원도청도 부산 피난행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춘천대첩·홍천 말고개 전투 6·25 전쟁사 중요 역할
도, 휴전으로 7군33면 수복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한반도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지금까지 휴전상태다. 6·25전쟁 총성이 가장 먼저 울린 곳이 명주군(현 강릉시) 옥계면 정동진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청은 전쟁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가 원주,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춘천으로 되돌아 왔다. 춘천대첩과 홍천 말고개 전투 등 6·25전쟁사에 있어 중요한 전투가 강원도에서 벌어졌다. 그 어느 지역보다 전쟁의 상처를 가장 먼저 경험한 강원도의 6·25전쟁 전후 상황을 조명해 본다.


 

▲ 제3사단 양양 38선 돌파 기념 사진. 사진출처= 江原道史


■ 6·25전쟁 직전 강원도

강원도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에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졌다. 동쪽은 양양군 현북면, 서면, 중부는 인제 기린면, 남면, 그리고 서쪽은 춘천군 북산면, 신북면, 사북면 지역에 38선이 그어졌다.

양양과 인제의 절반이 북쪽으로 넘어갔고 춘천군 일부도 북한에 속했다.

도 전역이 38선으로 분단되기는 했으나 해방직후부터 주민왕래와 물물교환이 계속됐다. 춘천 사북면의 38선 경계지역과 인제군 남면 관대리 부근, 주문진 등이 대표적인 교역지였다. 38선은 그어졌지만 남북교역과 같은 남북교류는 비공식적으로 지속됐다.

이런 남북상황 속에 1947년 9월 17일 미국 마샬 국무장관은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식의제로 상정한다. 그 해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파견한다는 미국제안을 가결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정은 1948년 3월 17일 미군정법령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 5월 10일 한국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다. 5월 31일 제헌국회가 국회의사당에서 개원됐고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 김동원이 선출됐다. 이어 한민당 소속의원이 다수를 차지한 헌법기초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 8월 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1948년 10월 18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초대 강원도지사로 이종현씨가 부임했다. 평북 출신인 이종현씨가 강원도지사에 기용된 것은 한민당계 인사를 우대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수립후 첫 강원도정의 인적 구성은 내무국장에 이계록, 사회국장 김선량, 산업국장 신용우,경찰국장 송병섭 씨가 임명됐다. 도청 조직도 종전 8국34과에서 5국 23과로 대폭 정비됐다.

이종현 지사는 3개월 재임하다 이듬해인 1949년 2월 농림부장관으로 영전됐다. 지사 자리는 얼마동안 공석이었다가 그해 6월 양성봉이 2대 지사로 부임한다.

그 역시 5개월만 근무하다 고향인 경남지사로 영전되고 그해 11월 17일 양구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인 최규옥씨가 제3대 지사로 임명된다.

최규옥 지사는 정부수립 후 처음 도 출신이며 지역사정에 밝다는데서 도민들의 많은 호감을 샀지만 반 년 후 발발한 6·25전쟁으로 도정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워렌씨.(미군촬영)


■ 6·25전쟁 발발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간 북한은 1948년 5월14일 남한에 전기 공급을 중단하면서 38선이 굳어져간다. 1949년에 접어들면서 북한군은 38선 접경지대에서 불법적인 남침을 빈번하게 일으킨다.

1949년 8월 대규모 정규군이 인제 신남지역으로 침투, 우리 측 진지에 포격을 가하고 소양강을 건너 공격했다. 1950년 1월에는 춘천군 유포리 종축장과 신북면 발산지서를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 북한군은 오대산과 태백산 지구에 게릴라들을 침투시켰다. 이들은 1948년 10월 발생한 여수·순천반란사건 이후 강원도 산악지대로 숨어1950년 4월까지 10차례 걸친 유격전이 벌어진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국군은 횡성, 삼척, 평창, 춘천, 인제 등에서 유격대 토벌에 나섰다.

이처럼 게릴라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중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한다.

북한은 정규군 10개 사단, 30개 연대 12만명과 특수부대 6만명과 각종 포 3041문, 소련제 T34형 전차242대, 야크기를 비롯한 항공기 211대를 보유했다. 반면 한국군은 8개 사단, 22개 연대 6만7000여명의 정규군과 지원부대 병력을 합쳐 9만4000여명에 불과했다.

북한군은 38선 전면 침공과 함께 동해안을 주요 루트로 정했다.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549부대가 명주군 옥계면 정동진에 3시 상륙했다.

이곳에서 6·25전쟁 발발의 첫 총성이 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25전쟁 발발 후 강원도청은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1951년 4월 15일 원주시 일산동 구 원주군청 자리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피난민 구호에 나섰다.

강원도청은 1953년 7월 30일 춘천으로 완전 수복될 때까지 원주도정시대를 이어간다.


 

▲ 1953년 휴전직후 현 춘천 죽림동 성당부지에 세워진 사제묘비.(미군촬영)


■ 휴전과 군사분계선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끝이 났다.

155마일 전 전선에서 일제히 포화가 멎고 불안한 휴전의 정적이 찾아 들었다.

38선은 없어졌지만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하게 된다. 동해안은 양양·속초·거진·대진 등이 회복되었으나 서해안에는 38선 이남에 있던 개성 등을 잃게 됐다.

강원도는 휴전 성립으로 철원, 김화, 화천, 양구, 인제, 고성, 양양 등 7군 3읍 33면을 수복했다. 38선 분단으로 공산 치하에 들어갔다가 6·25전쟁 후에 들어온 지역을 ‘수복지구’라 불렀다. 38선으로 분단된 강원도는 정전협정으로 또 다시 분단됐다.

한반도의 군사 분계선은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계를 이루는 선으로 각각 남북 2 km 범위에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됐다. 정전 협정후 62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

안은복 ri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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