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선주

국립춘천박물관장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 특별전은 25일에 끝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던 작품과 국립춘천박물관이 발굴하여 소장하고 있는 강원도 양구 청화백자 자료들을 한데 모아 꾸민 전시이다.

청화백자는 백자 태토 위에 코발트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고온에서 번조한 고급자기이다. 청화백자를 제작하는 데 사용된 코발트 안료는 원래 페르시아 지방에서 생산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렸으며, 매우 값비싼 재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왕실에서만 그 사용이 허락되었다. 조선 청화백자는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서 제작되었지만 문양의 소재와 공간 구성, 색조, 기법 등에서는 독자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선 청화백자는 어디에서 제작되었을까? 왕실의 청화백자 제작을 담당한 것은 조선시대에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곧 관요(官窯)였다. 1467년경에 경기도 광주 일대에 설치된 분원은 10년 주기로 땔감이 무성한 곳을 따라 옮겨 다니다가 1752년부터 자기 제작에 필요한 재료와 백자의 운송에 편리한 입지 조건을 갖춘 광주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여 1883년 민영화되기까지 수준 높은 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분원리에 정착을 하기는 했지만 백자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질 좋은 흙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순물이 적고 입자가 균질한 특징을 지닌 양구 백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백토의 채굴과 운송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굴취에 대한 폐단으로 다른 지역에서 백토를 옮겨오도록 하였으나, 사옹원에서 양구 백토가 아니면 그릇이 몹시 거칠고 흠이 생기게 된다고 하자 다시 양구 백토를 가져다 쓸 것을 건의하기도 하는 등 양구 백토의 우수함을 확인할 수 있다(‘숙종실록’ 숙종 35년 1월 2일). 그러나 이는 당시 양구를 비롯한 그 인접 지역 사람들을 엄청난 노역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숙종실록’(숙종 40년 8월 23일)에는 양구현에서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가 실려 있다. “양구의 5백호의 백성으로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산꼭대기를 뚫게 하여 겨우 토맥(土脈)을 찾으면 언덕이 무너져 압사하는 사람이 없는 해가 없습니다. 수 개월의 공력을 들여 5백석의 정토를 겨우 채취한 뒤 춘천, 홍천, 인제, 낭천, 양구 다섯 고을에서 각기 인력을 차출하여 선소(船所)로 운반하여 분원(分院)에 상납하는데, 춘천, 홍천, 인제, 낭천 네 고을은 채굴하는 데 참여하지 않고 운반하는 데에만 참가해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양구는 지토선(地土船)도 없이 백토를 채굴하는 어려운 일을 홀로 떠맡고 있는데 운반하는 일까지 맡기니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처럼 강원 지역 선조들의 힘든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조선 청화백자를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를 통해서 선조들의 결과물을 후손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는 근대기 양구 일대 가마터에서 분원의 전통을 잇는 청화백자가 생활용기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강원인의 청화백자’ 코너를 마련하여 국립춘천박물관과 양구군이 함께 발굴한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가마터 청화백자들도 전시하였다.

이 전시는 왕실의 전유물이었던 조선 청화백자의 미의식과 한국인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는 푸른 빛깔 무늬의 감수성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소유하지 않아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 박물관에서 청화백자의 아름다움과 그에 담긴 문화를 향유함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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