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德田 이응철

수필가

동한(冬寒)이 모질게 차다.

예전 북풍한설에 문풍지가 몸태질을 하고 윗목에 요강이 얼고, 짜 논 걸레가 돌덩이가 된다. 길고 긴 겨울밤 삼태성이 척 기울어지고 첫닭이 울면, 서둘러 군불을 때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낀다.

TV는 물론 번듯한 라디오도 없어, 거미줄 같은 안테나에 광석으로 전파를 잡는다. 레시버로 모기 소리만한 방송을 듣고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중계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긴 밤, 실내 오락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투전에서 그 다음 화투치기로 전해진다. 혼자 즐기는 재수보기, 운수 띠기와 두 명이 할 수 있는 육백치기, 네명이 할 수 있는 꽃 맞추기 민화투, 만단보기와 사행성이 강한 나이롱 뻥, 많이 둘러앉아 할 수 있는 짓고땡, 섯다가 주종을 이룬다.

예전 초가는 창이 유별나게 많은 가옥 구조라 아무리 문풍지를 달아도 보온이 힘들다. 구들장의 두께가 웃풍을 좌우한다. 초가삼간은 머리통이 시려 잠을 이룰 수 없어 겨울나기가 힘들었다.

긴 겨울밤을 보내던 조상의 지혜를 꼽아본다. 사랑방에 모여 새끼를 꼬고 집에 멍석 틀을 차리고 줄을 건다. 목청 좋은 나그네를 모셔 장마당에서 구해온 얘기책을 듣는다. 소문이 퍼지면 줄레줄레 아낙들이 모여든다. 등잔불 아래 심청전, 충렬전, 숙향전, 홍길동전 얘기책을 변사처럼 청승맞게 읽을 때면 순간 추임새를 잊지 않고, 한 소절이 끝나면 약속이나 한 듯, 눈물까지 훔치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밤이 이슥해지면 아낙들은 무 구덩이를 찾는다. 긴 장대 끝에 갈고리를 매어 무를 찍어 올린다. 싹이 튼 무도 있다. 깎아 어적어적 둘러앉아 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랜다. 메밀국수도 눌러 먹는다. 국수틀이 없으면 밤에도 한마장이 넘는 곳까지 가서 사먹고 오기도 했다.

화투치던 젊은 총각들은 어떠한가! 삼경이 지나 첫닭이 울면 닭서리, 토끼서리를 감행한다. 감쪽같이 서리를 해도 다음날이면 초라니 같은 자들 입방아로 금세 소문이 무성하지만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한다. 찬 보리밥 꽁댕이를 질화로에서 비벼 총각김치를 꺼내 겨울밤을 채우지만, 용케 기제사가 있어 환희 불 밝히면 우르르 달려가 소위 제사방을 쳐 배를 채우기도 한다.

겨울 산마루에 부엉이 우는 밤. 해묵은 초가집 처마에 사다리를 놓고 아닌 밤중에 참새사냥도 했다. 손전등인 덴찌로 잠든 참새를 움켜내던 밤, 왜 그렇게 무서운지-. 폭설이라도 내리면 인가까지 내려와 시퍼런 광채로 짚더미 뒤를 서성이던 왕눈이 소문이 파다하다. 혼비백산되어 마루 안쪽에서 쩔쩔매던 암캐가 질식했다는 얘기에 등골이 오싹하던 겨울밤이다.

1960년대 겨울이면 야학(夜學)이라고 마을마다 문맹퇴치가 한창이었다. 긴 겨울밤 가갸거겨 소리에 겨울밤은 깊어간다. 동천(冬天)이 차다. 매몰찬 눈보라가 온 동네를 휘젓는다. 어두울수록 별은 빛나지만 삼태성이 척 기울어지면, 깊은 겨울밤 구들에 온기가 식어가고 형제들은 더욱 옹크린다. 마실 다녀온 형님 거동 좀 보소. 안방 화롯불을 인두로 다독이더니 잠든 어린 동생들 내복을 강제로 벗긴다. 우두둑, 우두둑-. 이 사냥으로 겨울밤은 깊어간다.

소한 추위 때부터 밤이면 우데기처럼 아예 가마니 담요로 창을 막곤 했다. 목화솜도 아닌 헌 옷가지를 넣어 만든 무지륵한 이불을 처덕처덕 덮어주시던 어머니 손길-.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횃불 같은 사랑의 횃불은 길고 긴 겨울밤, 고도의 물질만이 세상을 향유하지 못함을 일깨우는 풍속도가 아닐까.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