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희 교육감의 책 ‘책갈피에 담아놓은 교육이야기’를 읽고

▲ 하창수

소설가

교육을 흔히 ‘백년대계’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건 교육전문가가 아니라도 아는 일이다. 백년은커녕 한 세대조차 아우르지 못하는 교육은 허다하게 바뀌는 입시정책이 잘 대변하지만, 공교육에 대한 절망의 진원은 어쨌든 학생들이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다. 그 학교가, 좀 가혹하게 표현하자면, 학교가 아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랑과 존경, 학우들 사이의 우정 - ‘지금’, ‘이곳’의 학교에서는 거의 찾기 힘든, ‘학교’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게 교과서에 담긴 내용이 전부라면 학교를 ‘덩치 큰 학원’이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을 것이고, 굳이 학교가 아니라도 얼마든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일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상당수의 학부모들은 원인을 찾아보려고 하기는커녕 원인을 찾으려거나 찾아낸 원인들을 공론화하는 사람들을 적의의 눈길로 바라보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 지점에서 ‘백년’은 속절없이 줄어들고, ‘대계’는 시류를 좇아가는 자잘한 계획들로 분해되어버린다.

도민들이 직접 선출한 교육감으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해 새로운 해를 맞은 민병희 선생의 <책갈피에 담아놓은 교육이야기>를 읽으며 줄곧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절망했던 학교가 사실은 희망의 진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확인은 교육의 미래를 그럴 듯하게 펼쳐 보이는 거창한 청사진이 아니라 가령, ‘존재의 가치’라는 제목이 붙은 글의 첫 대목, “이 나라에서 학생은 사람도 아니다”와 같은 마음은 아프지만 현실을 정확히 짚어내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인식이 있은 뒤에야 “하루 15시간씩 공부하는 기계”인 학생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이 연민은 다시 사랑의 회복을 불러오며, 이렇게 회복된 사랑을 통해 “길이 없는 건 아니다. 길은 뜻밖에 가까운 곳에 있다. 끝없는 경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이 바라는 길의 반대로 가면 된다”는 혜안이 생겨난다. 글의 제목처럼 ‘존재의 가치’란 누구나 생래적으로 갖고 있음을 가르쳐주는 곳, 만약 그것이 훼손되었다면 회복을 위해 다 함께 노력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서울 쥐 시골 쥐’라는 제목의 글은 마을주민의 울력으로 세워진 ‘작은’ 학교와 화려함을 좇아 덩치만 불린 도시의 ‘큰’ 학교 중에 어떤 학교가 진짜 학교인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오랜 해직기간을 보내고 봉의여중에 근무하면서 3년 동안 졸업생들의 앨범을 만들어줄 정도로 사진의 매력에 빠졌던 경험이 담긴 ‘사진’이라는 글에는 교육자의 다감한 심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이들은 교사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교사에게 비추면 교사는 아이에게 받은 그 빛을 되쏘고, 그 빛이 다시 아이에게로 가 얼굴색을 바꾸게 하는 것, 그런 얼굴빛의 순환, 이게 교육이 아닐까” 내가 절망하는 학교는 학생과 교사가 주고받는 이런 눈빛이 사라진 무채색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안타깝게도 “아이들의 아침, 아이들의 저녁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애절한 마음을 거부하고, “공부는 잘 못해도 나무도 잘 타고 목도리도 잘 뜨고 말씨까지 아름다운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지혜의 시선을 외면한다.

<책갈피에 담아놓은 교육이야기>는 오늘의 우리가 왜 학교에 절망하는지를, 하지만 그 절망에 무릎 꿇지 않고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을, 현장에 있어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으로 들려준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간절한 요청에 ‘지금’, ‘여기’의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다. 속절없이 줄어든 ‘백년’을 회복하고 문자 그대로의 ‘대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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