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우

시인·한림대 연구교수

박근혜 대통령의 추락이 안타깝습니다. 지지율은 연신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고, ‘날개 꺾인 대통령’ ‘레임덕의 시작’등,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차마 뉴스 보기가 겁날 지경입니다. 이런 결과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의혹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내치면 누가 내 곁에서 일하겠는가? 교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문고리 권력의 교체를 단정적으로 부정한 순간, 이미 예견된 것에 다름 아닙니다. 대통령은 훌륭한 ‘청와대의 주인’이었을지언정,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보기에 바람직한 종[公僕]의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대통령 곁을 떠나는 장관이나 비서관들의 언행을 보면, 곁에 있는 누구에게나 대통령이 그런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이 글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우려가 크긴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곧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박대통령의 국정에 대한 뿌리 깊은 충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들이 청와대를 향해 보여준 행태는,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 사람들의 행동거지는 저자에 유행하는 ‘의리’로 보아도 창피스러울 정도지만, 청와대의 리더십 시스템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에 관심을 갖는 진짜 이유입니다.

떠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소위 명분(名分)입니다. 대저 명분이란 명목(名目)과 본분(本分)을 의미합니다. 명목이란 마땅히 있어야할 본분을 지시하고, 본분은 명목의 정당성을 제공하여 양자가 일치 병립하는 것입니다. 명목 없는 본분은 공허하고, 본분 없는 명목은 부실합니다. 이런 명분론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이 국장·과장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조치를 요구했다고 폭로(?)한 장관의 모습이나, 비서실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던지는 것으로 국회출석을 거부한 수석비서관의 행동은,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명분이라 하기엔 너무나 한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분에 자신의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일본의 ‘하라키리’ [腹切]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할복은 일본 무사들에게는 ‘명예로운 자결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할복-일본인은 어떻게 책임지는가』, 야마모토 히로우미/이원우).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바로 얼마 전, 청와대 문서 유출에 관련된 한 경찰관의 자살은, 그가 남긴 긴 유서에도 다 담을 수 없었던 어떤 처절한 명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입니다. 그가 남긴 ‘운명이다’라는 마지막 말- 그 한마디로 대신하고 싶었던 노대통령의 명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슈테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 고상하게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성숙한 자의 행동이다. 성숙한 인간은, 비천하게라도 살아서 그것을 보여준다.” 결국,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귀한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건 합리화 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

이런 차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존경스러운 것이고, 그 엄청난 비난여론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청와대의 3인방이나 비서실장의 입장에, 일말의 이해됨이 있는 것입니다. 물러나기로 작정 한다면야 ‘도끼를 들고 나서서’라도, 왜 그리 상소[持斧上疏]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게라도 버티는 것이 성숙한 행동일 것입니다. 다만, 청와대의 리더십 시스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문제는, 드러난 여러 현상들만 보더라도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 분들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날로 심화되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 그분들의 진퇴에 어떤 명분을 내세울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입니다.

아무튼지, 국민들은 하루속히 대통령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대통령이 행복하지 않고서야 어찌 ‘국민행복의 새 시대’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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