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우

한림대 연구교수

‘갑(甲)질’ 이라는 말로 시작하려니까, 유행어에 편승하는 것 같아 조금 식상합니다. 그렇다고 뭔가 새로운 갑질을 꺼내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갑’이라는 말의 본질을 되짚어보고, 그 어처구니없는 쓰임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갑’이란, 쌍방의 계약에서, 편의상 의뢰하는 입장을 ‘갑’이라하고 수탁하는 입장을 ‘을(乙)’이라 하는데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예컨대, 정부가 발주하는 계약에서 ‘갑’이란 늘 해당 관청입니다. 민간의 경우에도 당연히 주도하는 자가 ‘갑’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 보니 대등한 당사자의 계약이지만 대체로 ‘갑’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것이고, 그런 상황을 담보하듯이 이런 계약서에는 ‘내용의 해석에 이견이 있을 경우에는 갑의 의견을 따른다’는 말이 관행적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른바 ‘갑질’은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이런 ‘갑’을 영어로는 ‘클라이언트(client)’라고 합니다. ‘의뢰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클라이언트의 어원을 따져보면, 그 의미가 갑질에서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로마의 ‘클리엔테스(clientes)’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로마의 평민(플레브스plebs)들은 귀족(파트리키patrici)과 계약을 맺고 여러 가지 보호를 받는 반면 보호자들에게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주종(主從)관계와는 분명히 다른 신의적 피호(被護)관계인 것인데 여기에서 ‘평민의 입장’이 바로 클리엔테스입니다. 평민이 의뢰인, 곧 ‘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로마와 로마가 정복한 나라의 국민 사이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큰 의미에서 정복국가는 로마의 클리엔테스였던 것이지요. 다른 나라의 식민지 관리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이런 차원에서 보면 모름지기 권력을 위임한 국민이 ‘갑’이고, 국회나 정부가 ‘을’인 겁니다. 국회의원이 대리기사를 폭행한 것은 분명 ‘을’의 만행이요, 제대로 된 회사라면 ‘땅콩 회항’사건도 ‘갑’질이 아니라 ‘을’질인 셈입니다. 한 때 어느 야당의 회의장에 ‘을’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는 취지의 백드롭을 붙였던데 그게 얼마나 웃기는 소리인지 이해가 됩니까?

오늘날 이 클리엔테스라는 의미를 그대로 쓰는 곳이 사회복지 분야입니다. 사회복지에서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을 일컬어 클라이언트라고 합니다. 그들이 보호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뒤늦게 발견된 독거노인의 외로운 주검이 국가의 책임인 이유, 어린이집 교사의 원생에 대한 폭행이 무서운 범죄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갑’의 처지임에도, 정부계약에서의 관청과 너무 차이가 납니다. 더구나 요즘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지논쟁은 정말 가관입니다.‘을’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하는 걸 마치 큰 자선이나 베푸는 것인 양 호들갑을 떱니다.

정령 ‘갑’이 원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것도, 그리 큰 것도 아닙니다. 제때에 결혼해서 마음 놓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기를, 노력하면 누구나 최저의 임금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를, 집에서나 밖에서나 여러 위험으로부터 신변을 지킬 수 있기를, 평생을 일한 대가로 큰 고통 없이 노년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그것이 안 돼서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나라에서 쳐놓은 안전장치(social safety net) 덕택에 구조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것도 나라 형편에 맞게 말입니다. 단 한번도 ‘무상’이라는 이름으로 무얼 해달라고 요구한 적 없습니다. 모두 인기에 영합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정치권과 정부가 복지문제를 놓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클라이언트들은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말 못하는 짐승도 자기 흉보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쁠 것이니 귀엣말로 속삭였다’는 황희 정승의 고사도 있건만, 공개적으로 생색내는 꼴이란 정말 민망함의 극치입니다. 제발 ‘을’의 입장에서 ‘갑’질 좀 그만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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