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흥우

수필가·시조시인

경칩을 지난 지 며칠 되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백두대간 고원의 땅에는 비닐하우스들이 허물을 벗은 채 속대만 앙상하니 드러내 더욱 스산하다. 모정 탑 간판이 보인다. 대관령면 횡계리 황병산에서 발원하여 수하리 도암 댐을 거쳐 흐르는 물이 물이끼를 머금은 채 유유히 송천에 놓인 세월교를 빠져나가고 있다. 다리를 건너니 문을 열지 않은 크지 않은 가게와 모정의 탑 길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살폈다. 차옥순 여인이 서울에서 23세에 강릉으로 시집와서 4남매를 낳아 기르다가 아들 둘을 잃었다. 남편마저 정신질환으로 먼저 보내고 어렵사리 살아오며 40에 이르렀다.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계곡에 3000개의 돌탑을 정성으로 쌓으면 집안의 우환이 없어지고 잘될 거라는 예언을 했다. 그 후로 노추산 기슭 율곡의 정기가 서린 이 땅을 찾아 1986년부터 26년을 한결같이 돌탑을 쌓아 3000개를 완성했다. 그리고는 2011년 8월 29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단다.

놀랍고도 측은했다. 0.9㎞라는 숫자가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아 걸어보기로 했다. 조금은 덜 다듬어진 자연스런 길을 걷다보니 나무다리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돌탑 군이 만들어졌다. 돌탑의 둘레도 두어 아름으로 엇비슷하고 높이는 탑을 쌓은 차 여사의 키를 짐작이나 하게 하듯 오륙 척에 줄을 맞추기도, 둥글게 이리저리 돌기도 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하면서 쌓아서 비바람에 잘 견디게 했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차옥순이란 한 여인의 힘으로 이 많은 탑을 쌓았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를 않았다.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다른 힘이 작용했을 것 같았다. 탑 아랫부분에 놓인 돌들은 장정의 남자들도 혼자 들기에는 힘겨웠을 벅찬 돌들이었다. 맨 위에 마감으로 올려놓은 돌들도 60대의 여인네 힘으로 그 높이까지 올려놓았다기에는 하나 둘도 아니고 믿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떤 힘이 함께 했을까. 이웃사람들이 더러는 도왔을 거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길고도 긴 26년 동안 하는 일에다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 쓸데없는 일을 이 깊은 산속까지 찾아와서 도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까운 이웃에는 사는 사람도 없거니와 있다하더라도 농사일로 바쁘게 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차 여사에게 게시를 했던 신의 조화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음에는 설총과 이율곡 등 이 나라 역사적 성현 두 분께서 입산수도를 했던 산, 노추산 땅의 기운이 있었을 것이다. 탑 거리를 살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물의 기운을 느끼고 더 깊이 들어가면 바람의 기를 받는다. 탑사이로 더 걷다보면 차 여사가 기거하던 터에 이르러 차 여사의 열정을 느낀다. 차 여사가 이 대단한 일을 해 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자식에 대한 모정이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식을 잃은 아픔을 승화시켜 남은 자식들의 안녕을 지키려는 애절한 염원과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럽게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돌덩이 하나하나에 기원으로 풀칠해서 굳게 붙여놓았기에 비바람에도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자식과 남편을 잃은 애타는 고초와 기구했던 자신으로부터 새롭게 탈바꿈하고자 했던 열정에 하늘이 감동해서 지수화풍의 힘을 모아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엄하기만 한 산을 쳐다봤다. 노나라 공자와 추나라 맹자를 기려 이름으로 했다는 노추산 기슭에서 설총과 이율곡 두 성현이 수도한 땅기운이 이 시대에 다시 큰 인물을 수련시켜 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누군가가 유창한 말솜씨는 아니더라도 애절한 차옥순 여사의 사연을 들어 헤아릴 수 없는 모정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으면 더욱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서는 길의 세월교를 들어섰다. 이때쯤 차 여사의 후손인 누구와 배웅인사라도 나누며 헤어졌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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