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흥우

수필가·시조시인

춘천에 전철이 운행되면서 시작한 서울 산행이 몇 해 되다보니 이제는 전철이 닿는 곳의 여러 산을 찾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김유정 역에서 내려 금병산을 올랐다. 산 정상에 마련된 전망대에 올라서 간식으로 준비한 빵과 물을 꺼냈다. 빵을 한 입 물었을 때 어디선가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전망대 난간에 거침없이 앉아서는 머리를 갸웃거린다. 조금 있자니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빵부스러기를 던져주었더니 두 마리가 함께 날아들어 쪼아 먹는다. 잠시 후에는 두 마리가 더 날아왔다. 나는 장난기가 동하여 빵부스러기를 손바닥에 놓고는 팔을 내어밀었다.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서 한 마리가 날아들어 빵조각을 물고 갔다.

사람들이 저희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얼마 전에는 서울 상봉역에서 전차를 기다리다가 비둘기를 본적이 있었다. 비둘기는 사람들이 있는 사이사이를 다니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어디에 과자부스러기라도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유치원에서 숲 생태해설을 하고 있다. 주 1회 정도 유아들에게 나무며 풀, 동물에 이르기까지 자연현상을 설명해주면서 아이들과 들과 산을 살피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즐거움 속에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요즈음 와서 아이들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할아버지 선생님’하면서 함께 재미있게 공부하던 아이들인데 이야기를 해줘도 들어주지를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멋대로 놀려고 한다. 유아담임 선생님이 여러 가지로 통제를 해보려고 애를 써 봐도 들판에 나온 아이들은 ‘야생’으로 돌변해서 마구 돌아다니고 저들 각자가 관심 가는 것에 몰두해 버리고 만다.

숲 해설이니 하는 목적 있는 교육활동을 하기에는 힘겹게 되었다. 숲 해설에 임하기 전에 해설대상을 정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해설방법도 나름대로 구안을 해보건만 현장에 임해서 대상 아이들을 만나면 대개는 계획이 무시되고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교수자의 안타까움이 따르게 된다.

그 원인은 분명했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누구도 꾸짖지 않거나 어떤 형태로도 혼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가정과 사회가 아이들에게 이런 믿음을 만들어주었고 지금은 국회까지 나서서 이런 확신을 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온몸으로 익히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 정도로는 절대로 자기들을 꾸짖지 못한다는 믿음이 굳게 자리 잡은 아이들은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난 새들의 믿음은 야성을 잃게 했고, 아이들의 믿음은 수업시간조차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있다. 어떤 이는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교수방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교육활동을 모든 아이들에게 흥미 있는 활동으로 만든다는 것은 55년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내 좁은 식견으로는 ‘글쎄올시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미래가 걱정되는 믿음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야생동물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야성을 상실했을 때 올 결과와 아이들이 오늘 날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가져다 줄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두려운 존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칭찬과 격려를 해주면 좋아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자신의 행동을 고쳐야 하겠다는 배움의 표상으로는 받아들이게 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어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버리면 더 크면 잘 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그런데 조금 더 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러서도 모두 제 멋대로 완전 자유만을 찾게 한다면 결국 그들 한사람 한 사람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질서와 협력은 언제 배우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 저마다 사는 방식을 찾아 살아가기야 하겠지만 기본적인 질서와 협력이 있어야만 인간 사회가 이어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걱정되는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