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언

미술평론가

2015평창비엔날레 예술감독

‘문화올림픽’이란 화두는 우리의 지상명제로 회자되고 있다. ‘문화올림픽’이라는 슬로건이 드러내는 지향점은 분명하다. 하나는 올림픽 자체가 발상의 측면에서 스포츠와 예술, 제의 등이 복합된 ‘문화 중의 문화’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 하나는 지나치게 결과 내지는 승부만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따라서 그 본질에서 벗어나 왜곡되거나 변질되어 가는 근대올림픽의 모순을 극복함에 있어 최선의 처방 수단을 문화에서 찾고자 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올림픽의 본질이 문화임을 다시금 천명하는 엄숙한 메시지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류에게 흐르는 치명적 DNA인 전쟁 내지는 파괴의 충동과 본능,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고 평화와 번영으로 나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인류 공동체 최고의 축제가 바로 올림픽이다. 올림픽에는 파괴적 충동을 건전하고도 평화적인 문화적 에너지로 승화시키자는 약속과 합의가 담겨 있다. 우리의 삼한시대 제천행사들도 그러한 범주의 축제이다. 올림푸스로부터 채화된 성화를 소중히 전달한다는 의미의 ‘봉송(奉送)’이 왜 그렇게 경건하게 수행되고 있는가. 도시국가 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대립의 에너지를,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제전으로 승화시킬 것을 명한 신탁을 세상에 널리 선포한다는 의미 때문이다.

올림픽이야말로 고도의 정치적 메커니즘에서 태동되었지만 그 결실은 문화 그 자체이자 예술이다. 그러다보니 전체주의나 냉전시대에 자주 있었던 정치적 목적에서 강조된 ‘국가’라는 이데올로기, 혹은 자본에 의한 상업적 논리 등이 올림픽의 신성한 본질을 훼손시켜 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하는 문화올림픽은 이러한 불행했던 근대올림픽의 역사를 반성하고, 진정한 인류공동체의 정신성과 가치를 실현할 문화로서의 본질을 회복시켜야 하는 과제를 분명히 안고 있는 것이다.

문화올림픽이라는 모토 앞에서 선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올림픽을 통해 개최국가 및 개최지의 문화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점이다. 88서울올림픽이 우리 문화예술의 양적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면, 2018평창동계올림픽은 질적 성장을 실현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양적인 성장은 주로 인프라와 관련되지만, 질적인 성장은 시민들의 미의식과 교양에서 드러난다. 우리 강원지역의 경우 미술관이나 공연장 등의 시설과 시스템 등이 열악한 환경에서 질적 문화에 대한 논의 자체가 공허하다. 문화올림픽 실현을 위해 가장 비중 있게 출범한 평창비엔날레의 경우 전시공간의 부족에 시달리며, 또한 도민들에게 찾아가는 전시를 위해 시·군 순회전을 계획하고 있지만 역시 전시장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도내에 문화공간을 신축하고자 하는 열망들은 많지만 매번 직면하는 문제가 신축 예산 부족이며, 또한 유지 관리로 귀결된다. 무언가 활동을 하고자 할 때는 문화공간이 아쉽다가도 향후 유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이런 지역의 현실을 감안한 효율적 대안들이 절실한 상황이다. 정선군의 경우 시외버스 터미널 지하를 문화공간으로 꾸며 이용자들에게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사례를 하나의 모델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경기도 일산의 어느 아파트 공동체는 단지 내 주민편의센터 로비를 전시장으로 꾸며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관령 목장들이 단순한 자연체험으로 그치지 않고 문화 체험의 장으로 변모해가는 것이야말로 강원 특유의 문화 패러다임을 창출해내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 이는 강원도 환경과 실정에 맞는 문화공간 조성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유지에 큰 부담이 없으면서도 시민들의 생활 공간 안에서 문화 향유의 기회를 확대시키는 일은 문화올림픽 성공 개최에도 일익이 되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인 강원도 발전의 결정적 기반이 될 것임을 굳게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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