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언

미술평론가

2015평창비엔날레 예술감독

올해가 박수근 화백이 서거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는 선생의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박수근 선생의 화명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우리 국민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교감할 수 있는 순박함과 서민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화가라 불리기도 한다.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과정이 전부인 그가 오히려 전문 교육을 받은 기라성 같은 작가들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이제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수근 미술관 홈페이지에 실린 어느 저명한 작가 한 분이 한 이야기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는 누구냐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화가 박수근을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근 선생의 위대함을 비평가나 작가, 미술사가 등의 전문가들이 거론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선생의 당대는 거의 고독하고 소외된 독학 화가였을 뿐이다. 선생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들은 외국인이나 예술계 바깥의 문외한에 가까운 일반 대중들이다. 아이러닉한 일이지만, 그래서 선생의 예술세계는 더 각별하고 소중한 것이다.

박수근 선생은 우리 강원도의 자랑이기도 하다. 우리가 선생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단순히 강원도 출신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선생은 이미 강원도민만의 자랑이 아니라 대한 국민 모두의 자랑이다. 우리 강원도민이 선생을 각별하게 사랑하는 이유는 그런 피상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만의 예술세계 때문이다. 선생의 조그만 화폭 하나하나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과 힐링의 세계이다. 어렵고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솔직함, 그리고 정감이 넘치는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어찌 감동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강원도민이 공감하고 애착을 갖는 것은 선생의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정겨운 모습들이 바로 우리 주변의 것이라는 점과 미감 또한 강원의 정체성을 잘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다움’ 혹은 ‘강원다움’이라는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문화올림픽을 표방한 지금 외형적인 행사도 의미가 있겠지만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박수근 선생이 자신의 화폭에서 표현한 모든 것이 ‘강원다움’으로 귀결된다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강렬함보다는 담담함, 선명함보다는 무언가가 심오하게 은닉된 듯한 화면, 이 모두가 우리의 산하에서 흔히 보는 화강암 암각화를 연상시키고 있다. 평범함과 통속성을 심오한 격조의 미감으로 승화한 선생의 화폭은 우리의 과거이면서도 미래의 자화상이다. 선생의 화면에서 구현한 꾸밈을 모르는 순수함과 소박함이야말로 우리 강원의 문화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기도 하다.

수근 선생의 화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예술에 있어 편견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독학이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것, 토속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라 하여 고급예술로 보지 않으려 했던 것 모두가 편견의 무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무수한 편견에 갇혀 있다. 예술가란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기가 쉽다. 이러한 편견을 걷고 나면 우리 주변에 제 이, 제 삼의 박수근을 더 많이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문화 발전이 우리 공동체 번영의 첩경이라 말하면서도 지독한 편견에 갇혀 진기한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 마찬가지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의 사물들 역시 새로운 관심으로 면밀하게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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